탐정소설을 오락물에서 문학의 자리로 끌어올린
하드보일드 문체의 마스터 레이먼드 챈들러 (1888~1959)
“남자라면 이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 않고, 물들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시조,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 캐릭터의 성격이다. 중절모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담배를 문 채 냉소적인 말투를 내뱉는 필립 말로는 셜록 홈스와 함께 탐정계의 양대 산맥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다. 이 탐정 필립 말로 이야기로 미국 대중문학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선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스물두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1932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저가의 대중소설 잡지인 펄프 매거진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자신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늘 가슴속에 품어 왔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펼쳐 단편 「협박자는 총을 쏘지 않는다」를 쓴다. 5개월에 걸쳐 18,000단어를 사용하여 쓴 이 소설은 당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산실이었던 《블랙 마스크》지에 180달러에 판매되고, 마흔 중반이 넘은 다소 늦은 나이에 그는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 후 5년간 공들여 쓴 첫 장편소설 『빅 슬립』을 출판하여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하고, 이어 그는 필립 말로를 주인공으로 한 연작 『안녕 내 사랑』『기나긴 이별』 등의 장편소설을 낸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위대한 미스터리는 캐릭터 그 자체”라고 역설했는데, 위대한 미스터리 캐릭터 필립 말로가 바로 그 증거이다.
장편소설을 쓰는 중간중간, 그는 필립 말로와 맥을 같이하는 차갑지만 정의로운 탐정들이 나오는 단편소설을 썼고 이 역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펄프 매거진에 연재했던 다른 작가들이 빠른 속도로 시간 떼우기용 오락물을 생산해 낸 데 반해, 챈들러는 공들여서 완성도 높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에는 어린 시절을 영국에서 보내며 쌓은 고전 영문학의 감수성을 토대로 한 고독하고 쓸쓸한 서정성에 날카로운 비유가 살아 있었다. 챈들러가 구사한 차갑고 딱딱한 말투, 객관적인 묘사 등 그만의 특징적인 문체와 의외의 직유는 결국 ‘챈들리스크Chandleresque’라는 단어까지 탄생시켰고, 완숙된 계란처럼 딱딱하고, 이렇다 할 감정 없이 건조하게 전개되어 비정함을 물씬 풍기는 하드보일드는 하나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탐정소설은 오락물에서 문학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1930~1940년대 로스앤젤레스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그의 작품은 할리우드의 성장과 함께 대부분이 영화화되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시나리오 작가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포크너가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한 <빅 슬립>을 비롯하여 챈들러의 각본이나 영화화된 작품은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친다.
챈들러에게 있어 단편소설은 자신의 글쓰기에 물꼬를 틀어준 동기이자 장편소설로 가는 밑거름이었다. 단편 「금붕어」, 「붉은 바람」, 「골칫거리가 내 일거리」의 경우, 주인공 이름이 카마디, 존 달마스, 조니 달마스 등으로 다른 이름이었으나 1950년에 단편집으로 모으면서 챈들러는 주인공 이름을 필립 말로로 바꿔서 냈다. 「밀고자」의 경우에도 ‘탐정 사무실’이라고 썼던 것을 ‘필립 말로 사무실’로 바꾸었는데, 이를 통해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필립 말로’라는 연결고리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로스 맥도널드, 마이클 코넬리, 하라 료 등 수많은 작가들이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 바 있는데,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소에도 누누이 “레이먼드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었다”, “지금도 내 글쓰기의 이상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를 한 권에 집어넣는 것이다”라고 챈들러에 대한 애정을 밝혀 왔다. 또 폴 오스터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낸 이후 우리에게 미국은 결코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라고 극찬했다.
챈들러는 미완의 소설 『푸들 스프링스』를 포함한 장편소설 여덟 편과 단편소설 스물다섯 편, 에세이 일곱 편을 남겼다. 이번 단편선에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펄프 매거진에 기고했던 단편소설 아홉 편이 담겨 있다. 《블랙 마스크》에 기고했던 「밀고자」「네바다 가스」「스페인 혈통」「금붕어」와 《다임 디텍티브》에 기고했던 「붉은 바람」「진주는 애물단지」「골칫거리가 내 일거리」, 그 외 매거진에 실은 「눈 가의 돈다발」과 「기다리는 여자」이다. 오늘날 챈들러를 있게 한 위대한 미스터리 캐릭터 필립 말로와 하드보일드 문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탐정소설 아홉 편을 만날 수 있다.
ㆍ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냈고, 이후 우리에게 미국은 결코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_ 폴 오스터
ㆍ 묘사를 잘하는 비결은 명료한 관찰력과 명료한 글쓰기인데, 여기서 명료한 글쓰기란 신선한 이미지와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_ 스티븐 킹
ㆍ 지금도 내 글쓰기의 이상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를 한 권에 집어넣는 것이다. _ 무라카미 하루키
ㆍ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그의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흥미롭고 놀라운 이야기로 그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스타일과 비전을 가진 작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독자들은 챈들러의 유혹적인 소설에 매료될 것이다. _ 조이스 캐럴 오츠
ㆍ 챈들러의 소설은 몇 년마다 꼭 다시 읽게 된다. 그의 소설은 미국의 과거를 스냅숏사진처럼 완벽히 재현해 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낭만적인 표현은 어제 쓴 것처럼 생생하다. _ 조나단 레덤
<본문에서>
골칫거리는 좀 남아 있었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펜웨더는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게 일했다. 사건의 진상이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200달러짜리 정장을 걸친 시청 공무원들이 한동안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의 사실은 밝혀졌다.
피나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매니 티넨 일당 네 명이 더 연루되었다고 자백했다. 그중 두 명은 체포에 불응하다 사살되었고, 다른 두 명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처해졌다.
글렌 양은 제대로 종적을 감추어 다시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할 말은 다 한 것 같다. 2만 2천 달러를 공무원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공무원은 내게 200달러의 수고비와 9달러 20센트의 기름 값을 인정해 주었다. 가끔 나머지 돈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_ 「밀고자」에서
“이보게, 탐정. 나한테는 여기 멋진 집이 있네. 조용하지. 더 이상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아. 아무도 그럴 권리가 없지. 나는 백악관으로부터 직접 사면을 받았어. 나는 물고기들과 놀며 소일하고 있다네. 남자라면 뭐든 자기가 돌보는 걸 좋아하게 마련이지. 나는 세상에 땡전 한 푼 빚진 게 없어. 다 갚았거든. 이보게, 탐정, 이제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날 좀 내버려 두라는 것일세.” 그는 말을 멈추고 한 차례 고개를 내둘렀다. “누구도 나를 들쑤셔선 안 돼. 더 이상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그를 지켜보았다.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어.” 그가 말했다. “대통령에게 직접 사면을 받았단 말일세. 그냥 날 좀 내버려 두라고.”
나는 고개를 내두르고 그를 향해 계속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큼은 곤란하겠군요. 당신이 포기를 할 때까지는.”
_ 「금붕어」에서
그날 밤 사막바람이 불었다. 고온 건조한 샌타애나의 전형적인 열풍이었다. 이 바람이 산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머리카락이 곱슬곱슬 말리고 피부가 가려워지고 괜히 초조해진다. 그런 밤이면 어느 술판이든 한바탕 싸움으로 끝난다. 유순하고 가냘픈 아낙네들은 식칼의 날을 만지며 남편의 목을 노려본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칵테일 바에서 거나하게 맥주를 걸칠 수도 있다.
_ 「붉은 바람」에서
어이, 친구, 자네 강펀치는 금메달감이었어. 그렇게 화끈할 줄은 미처 몰랐지. 물론 대비를 못 한 탓도 있지만 말이야. 암튼 워낙 매워서, 한 일주일 동안 이빨을 닦을 때마다 자네 생각이 나더라고. 내가 줄행랑을 쳐야 했다니 참 유감이야. 좀 어수룩한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마음씨 좋은 자네를 버리고 떠나야 했다니. 둘이서 진하게 취하고 싶은데 난 여기서 오일 밸브나 닦고 있는 신세야. 물론 여긴 이 편지를 부친 곳에서 수천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이야. 자네한테 알려 주고 싶은 게 두 가지 있는데, 둘 다 진실이야. 난 정말 그 키다리 금발한테 홀딱 반했댔어. 그게 노부인 곁을 떠난 주된 이유였지. 진주를 슬쩍한 것은, 남자가 여자한테 홀렸을 때 나사가 좀 풀리는 것과 같은 그런 짓이었을 뿐이야. 진주를 그런 빵 상자 같은 금고에 아무렇게나 넣어 두는 건 범죄 행위야. 나는 지난날 동아프리카 지부티의 프랑스 인 보석상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진주가 진짜인지 모조품인지 구별할 정도의 안목은 갖췄지. 그런데 그 공터에 우리 둘만 남았을 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거래를 잘 밀어붙일 수 있었는데, 그만 마음이 물러지고 말았지 뭐야. 자네가 사로잡은 금발한테 내 안부 전해 줘.
_ 「진주는 애물단지」에서
“골칫거리가 내 일거리죠.” 내가 말했다. “하루 25달러에 총 250달러를 보장해 주면 일을 맡겠습니다.”
“나도 좀 챙기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애나가 우는소리를 했다.
“그럼 알아서 하시죠. 이 도시엔 값싼 애송이들도 많으니까. 오랜만에 애나의 멋진 모습을 봐서 반가웠습니다. 잘 있어요, 애나.”
이번에는 확실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내 인생이 좀 허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 가치는 있었다.
_ 「골칫거리가 내 일거리」에서
※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세계문학 단편선>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장편소설 위주의 관습에서 벗어나 단편소설에 초점을 맞춘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는 그동안 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거장들의 주옥같은 작품들과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의 형성과 발전에 불가결한 대표 작가들을 소개할 것이다. 아울러 지구촌 시대에 걸맞게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문학의 변방으로 여겨져 왔던 나라들의 대표적 단편 작가들도 활발히 소개해 단편소설의 발전이 문화의 중심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현대 대중문화의 성장은 전 세계적으로 미스터리, 호러, SF 등 문학 장르의 분화를 촉진했는데 이러한 장르문학의 형성에도 단편소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한 장르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들의 단편 역시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편소설은 그리스 신화가 그러했듯이 삶의 불변하는 단면을 촌철살인의 관찰력과 응축된 예술적 형식으로 꾸준히 생산해 왔다. 작가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그린 칼로 베어 낸 듯 날카로운 인생의 다양한 단면들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새로운 문학적 기법과 실험의 도입을 통해 단편소설은 현재도 계속 진화, 확장되고 있다. 작가의 예술적 열정이 가장 뜨겁게 투영된 다양한 개성의 다채로운 단편들을 통해 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통찰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문학작품은 독자가 앉은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쁜 일상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세계문학 단편선>은 중심을 잃지 않고 삶과 사회, 나아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