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성 동물은 사냥꾼이나 포식자를 피해 주로 밤에 활동한다. 〈야행성 동물〉에 나오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키 큰 남자와 키 큰 여자, 키 작은 남자와 키 작은 여자,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한 아파트의 위층과 아래층에 살면서 간혹 마주치곤 하는 이웃이다. 이들은 뭔가를 숨기고 있고, 각자 다른 이유로 밤에 깨어 있다. 어느 날 키 작은 남자는 키 큰 남자에게 다가가 포도주를 권한다. 그날부터 둘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의심할 바 없이 다정한 친구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미묘한 힘이 작동한다. 그리고 그 힘의 방향은 다소 일방적이다.
마요르가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문제를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하지 않는다. 불법 체류자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갈등의 발단을 스페인만의 문제로 국한하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법이 보호하는 국민과 그렇지 못한 비국민이 자연스레 서열화되고 그 안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후안 마요르가의 주제의식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생각해 보니 한국도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서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나라일 것입니다. 따라서 힘이 더 센 사람들의 우정을 수용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입니다.”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 1965∼)
현재 스페인, 특히,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극작가다.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1997년에는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5년간 마드리드와 근교의 중·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현재는 마드리드 왕립 드라마 예술 학교 교수다.
대표작으로는 <선한 칠인>(1989),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1999), <뚱뚱이와 홀쭉이>(2000), <천국으로 가는 길>(2003), <하멜린>(2005, 국립연극상, 막스상 수상), <맨 끝줄 소년>(2006, 막스상 수상), <다윈의 거북이>(2008, 막스상 수상) 등이 있다. 이외에도 스페인이나 다른 나라의 고전 작품들을 각색하기도 한다.
김재선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후안 마요르가의 《다윈의 거북이》(2009), 《영원한 평화》(2011), 《하멜린》(2012), 《천국으로 가는 길》(2013), 《맨 끝줄 소년》(2014), 《비평가/눈송이의 유언》(2016),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2018), 라파엘 알베르티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낸 전쟁의 밤(Noche de guerra en el Museo del Prado)》(2017), 알레한드로 카소나의 《봄에는 자살 금지(Prohibido suicidarse en primavera)》(2019), 《바다 위 일곱 번의 절규(Siete gritos en el mar)》(2020), 이그나시오 아메스토이의 《마지막 만찬(La última cena)》(2021), 부에로 바예호의 《시녀들(Las Meninas)》(2022)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