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는 김대중의 내란이었다. 김대중의 최규하 과도정부를 전복시키고 선거 없이 스스로 집권하려 하였기에 김대중의 내란이었으며, 그때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유혈 무장폭동 진압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럼에도 김영삼 대통령이 판결을 미리 정해놓고 선택한 법관들은 김대중의 내란을 전두환의 내란으로 바꾸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였다.
만일 1980년 5월에 내란이 있었다면, 그리고 김영삼 정부의 5·18 재판이 그 내란 사건에 대한 재판이었다면 어째서 그 사건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 않았는가? 그 사건 당사자는 최규하 대통령이었다. 김대중 등 내란세력의 공격 대상이 그들이 유신잔당 프레임을 씌웠던 최규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최 대통령이 그 사건 당사자였다. 따라서 만약 광주사태가 김대중의 내란이었는지 전두환의 내란이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재판이었다면 그 판단의 시금석의 최규하 대통령 본인의 말고 생각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선택한 5·18 재판 법관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말을 들어보기는커녕 연설문조차 한 줄도 읽어보지 않고 공소장과 판결문을 작성하는 우를 범하였다.
선거 없이 집권하려고 하였던 김대중 세력이 야기한 1980년 봄의 시위 상황을 최규하 대통령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역사는 소설이 아닌 사실에 의거하여 판단하여야 하며, 1980년 최규하 과도정부의 통치자는 최규하 대통령이었다. 따라서 최규하 대통령을 빼버린 공소장과 판결문은 소설이었다. 그리고 판검사들이 소설을 쓰면 재판 법리가 왜곡된다. 문제는 그 왜곡이 한 시대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다음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김영삼 정부의 정치 재판을 1980년 봄여름의 통치자 최규하 대통령의 연설문에 비추어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최규하 대통령은 국가비상시국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등 국가의 총체적 난국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마다 즉시 성명을 발표하거나 연설을 하였다. 본서 최규하 대통령 연설문집(1979년 10월~1980년 8월)에는 1979년 10월 하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직후 국가적 난국 수습을 위한 특별담화로부터 시작하여 1980년 8월 하순 새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성명을 발표할 때까지의 각종 연설문과 친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광주사태 당시와 광주사태 전후의 연설문들이 최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몹시 중요하다.
Dr. Dae Ryeong Kim studied history and international politics at the University of Maryland, and then earned a Ph.D. degree from Fuller Theological Seminary for his research in the field of epistemology. His postdoctoral activities includes a deep research in modern Korean history in 198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