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지구 벙커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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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세계, 끔찍한 벙커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한국문학의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 강영숙의 신작

 

한국일보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불안과 피로, 권태가 상존하는 현실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특유의 과감한 필치로 생의 누추를 탐구해온 소설가 강영숙의 네번째 장편소설 『부림지구 벙커X』가 출간되었다. 일찍이 가뭄, 해일, 황사, 바이러스 등의 소재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여러차례 다뤄온 작가는 이번 장편소설에 이르러 지진이 휩쓸고 간 도시의 모습과 벙커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선보인다. 매번 새로운 모습의 재난‧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인 채 집단적 공포에 휩싸여 갈등과 혐오를 증폭시키는 최근 세태 속에서, 소설의 디스토피아적 풍경은 우리에게 멀지 않은 미래를 경고하듯 생생하게 다가오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의 끝에는 벼락처럼 찾아와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재난, 그 이후에 대한 질문이 강렬하고 묵직하게 남는다.

부림지구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지진

압도적인 디스토피아적 풍경과 벙커에서의 삶

부림지구를 완전히 파괴해버린 지진 ‘빅 원’ 이후 일년이 지난 지금, 유진은 벙커에서 살고 있다. 화분에 꽂힌 풀처럼 땅속에 박혀 있다가 구출된 뒤 몇군데의 대피소를 전전하다가 정착한 곳이다. 무겁고 축축한 기운이 가득한 벙커 안에는 유진을 포함해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간간히 보급되는 생존키트와 벙커 밖 쓸 만한 잔해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부림지구 벙커X』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부림지구의 잿빛 가득한 풍경과 벙커에서의 삶이다. 도시와 재해라는 주제를 작품 속에서 꾸준히 다뤄온 강영숙은 이번 소설에서 재해의 면면을 한층 치열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특히 미세먼지, 대형 지진, 원전 사고 등 최근 몇년간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실제 재난의 기억들이 소설 속 풍경과 함께 뒤섞여 압도적인 장면들로 남는다.

유진을 비롯한 지진 ‘빅 원’의 생존자들이 벙커에 모여 살게 된 것은 지진 이후 정부가 부림지구를 오염지역으로 판단하고 고립시킨 탓이다. 오염지역의 이재민들이 부림지구를 떠나 근처의 N시로 이주하기 위해서는 몸에 생체인식 칩을 주입하고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계속 벙커에 남아 있다. 부림지구에 사람 키 만한 기계장치를 들고 흰색 방역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벙커 사람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데, 의지하던 사람들을 하나씩 N시로 떠나보낸 유진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소설은 결말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한편 작가는 탁월한 솜씨로 부림지구의 역사를 직조하며 ‘평범한 일상’이라는 표면 아래 이미 존재하던 균열과 격차를 끄집어내고, 사회적 계급과 약자의 자리를 한순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으로서의 지진을 사유한다. ‘빅 원’ 이전에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부림지구는 한때 제철단지로 잠깐의 번영을 누렸지만 폐쇄, 재개발 계획 중단으로 버려진 성처럼 남아, 대도시에서 실패한 어중이떠중이, 몸이 아픈 사람, 갈 곳 없는 사람들만 모인 지역이다. 그 어느 지역보다도 크게 무너지고, 누구 하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이 살던 부림지구를 빠르게 오염지역으로 고립, 방치하는 소설 속 정부의 모습은 허구의 설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우리 사회 도처의 불평등을 환기한다.

 

 

부서진 일상은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살아 있다는 감각 이후에 오는 것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벙커 안에서도 사람들은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고, 우연히 발견한 와인을 마시며 파티를 한다.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지 고민하고, 벙커 밖으로 나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며 바쁘게 하루를 보낸다. 부림지구와 끔찍한 벙커의 삶을 버리고 N시로 가는 방법은 있다. 동시에 유진과 벙커 사람들에게는 삶의 방식을, 모습을 선택할 권리도 있다. 유진은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까. 끔찍한 재난 이후에 살아 있다는 감각은 순간의 기쁨처럼 찾아오지만 무너진 일상을 누가, 어떻게 재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하나하나 천천히, 절박하고 끈질기게 인간을 찾아온다.

작가는 지진 다발 지역인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했던 2014년부터 이번 장편을 붙들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고, 이야기를 쌓아올리던 지난 7년간 재난‧재해는 매번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를 앞에 두고 작가는 “재해란 무엇인가, 재해가 과연 기회가 될 수 있을까”(작가의 말) 묻는다. 우리의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지금, 『부림지구 벙커X』는 멀지 않은 미래를 감지하고 긴요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강렬하게 남을 것이다.


작가의 말

 

사람을 바꾸는 건 다름 아닌 날씨,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몇년 전만 해도 지구 온난화가 사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지금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까. 4년 전쯤에 갔던 베이징 풍경. 상가 건물 지하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에 들어가 물건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바깥으로 나와 보니 퇴근 시간 무렵이었고, 스모그로 인해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베이징 시민들이 자전거로, 도보로, 집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자전거가 내 몸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데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재해란 무엇인가. 어린아이들 표현대로 정말 지구는 아픈 걸까. 재해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재해가 과연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모든 걸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재해 시 사람은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을까. 뜻밖에 일어난 재난은 어떤 계급이나 격차를 한순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재난과의 동거는 늘 더 어려운 쪽의 몫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해가 나기 전부터도, 지금도, 평생 동안 재해를 앓듯 살아간다.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모두들 그저 묵묵히 살고 있을 뿐인, 그림자 같은 착한 사람들이 이 소설에 있다. 나는 부림지구라는 허구적 공간 안에서 그들의 조용한 움직임을 따라 다녀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2020년 2월

강영숙

 

책 속에서

 

우리는 카레를 먹었다. 카레는 지진이 나기 전에 먹은 마지막 음식이었다. 연구원이 평소에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즉각 카레를 떠올렸다. 그냥 언뜻 생각 난 것이기도 했지만 카레의 짙은 노란색과 입안에 퍼지는 따뜻한 감촉이 좋았다. 길 쪽으로 난 창으로 카레 냄새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곧 카레 냄새는 카바이드 냄새나 목욕탕 수증기 냄새 비슷한 악취에 섞여 이상하게 변했다. 계속 증기를 쐬는 것 같은 느낌이 지속됐다.

“나한테 나는 냄샌가?”(39~40면)

 

“지진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연구원이 물었다. 평소에 하던 어떤 놀이 경험을 떠올려보라고도 했다.

“놀이 경험요? 지진은 그냥 다 무너지는 거예요. 겪어놓고도 그렇게 말해요? 놀이에 비유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우리는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41~42면)

 

“유진씨, 부림지구의 대표적인 문화나 정서 같은 거, 생각나는 거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깔깔 웃었다.

“문화라,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여긴 그냥 철이 많아요. 철요.”

“아, 철요. 그건 그렇죠. 제철단지니까. 그런데 왜 웃으세요?”

“몰라요, 그냥 웃겨요. 문화라는 말이 웃겨요.”

연구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43~44면)

 

낮에 대장이 준 시신의 몸에서 나온 휴대폰이 윈드점퍼 주머니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무심코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지는 게 신기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더듬기라도 하는 것처럼 긴장됐다. 눈을 부릅뜨고 죽은 남자와 비슷한 얼굴을 찾았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살았을 때의 얼굴이 터무니없이 밝게 재생됐다. 너무 놀라 감정이 격해지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고 싶지는 않았다. 급하게 휴대폰 전원을 끈 뒤 눈앞의 어둠속으로 던져버렸다. (97~98면)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여러분, 아까 말한 무릎길이의 치마 입은 제 친구 보신 분 있나요? 혹시 그애에 관한 나쁜 소식을 알고 계시다면 말하지 마세요. 너무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요. 제가 그애를 따라가지 않은 건 그애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아, 저는 부림타운 무도장 직원 장미라입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169면)

 

그러고 나서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쇠약해졌고 손도 쓸 수 없이 빠르게 죽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게는 이미 그것이 재난이었고 내 삶은 그게 다였다.

아버지의 유품이라고는 늘 입던 작업복 몇벌과 그때부터 막 쓰기 시작한 돋보기, 작업복 윗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푸른 줄이 그려진 수첩 몇개가 다였다. 수첩에는 고향, 노래, 희망, 또 고향 따위의 평범한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죽음을 말해줄 어떤 단서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보다는 다소 희고, 가만히 있는데도 몸에서 마른 갈대숲 같은 곳에서 나는 소리가 났다.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제철소 안쪽에서 뭔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도 많이 늙었네.”

아버지가 말했다. (262~263면)


About the author

강영숙 姜英淑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8월의 식사」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흔들리다』 『날마다 축제』 『아령 하는 밤』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회색문헌』, 장편소설 『리나』 『라이팅 클럽』 『슬프고 유쾌한 텔레토비 소녀』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백신애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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