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athan Swift (1667~1745) 조너선 스위프트는 1667년 11월 30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잉글랜드인 부모를 둔 잉글랜드계 아일랜드인이었다. 스위프트는 삼촌들의 보호 아래 성장해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교를 졸업했다. 1688년 명예혁명 후 퇴위당한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를 거점으로 왕국을 되찾으려는 내전을 벌이자, 스위프트는 잉글랜드로 피신한 뒤 은퇴한 유명 정치가 윌리엄 템플 경의 비서로 취직했다. 그동안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영국 국교회의 사제 서품도 받았다. 스위프트는 산문, 특히 풍자적인 내용의 산문을 발표하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690년대 후반에 집필한 『통 이야기』는 스위프트의 대표적 논문으로 종교와 학문의 부정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풍자했다. 1699년 템플 경이 세상을 떠나자 스위프트는 더블린으로 돌아갔다. 당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당이 당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휘그당이었다가 나중에는 토리당의 편에 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고 조지 1세가 등극하면서 토리당 내각이 붕괴하였다. 스위프트는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스위프트는 영국의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대작 『걸리버 여행기』(1726)를 집필했다. 그는 『드레피어의 편지』(1724)와 『겸손한 제안』(1729) 두 논문에서 아일랜드 문제를 거론했으며, 특히 가명으로 발표한 『드레피어의 편지』로 아일랜드의 영웅이 되었다. 1730년대 그는 더블린의 성 패트릭 대성당의 주임사제이자 아일랜드의 애국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스위프트는 평생 질병 으로 고통받았으며 말년에는 친지들로부터 “마음과 기억이 건전하지 못하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스위프트는 1745년 10월 19일에 사망했고 시신은 성 패트릭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유산은 아일랜드 최초의 정신병원을 건립하는 데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