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김사량이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은 그가 일제 말기에 일본어 창작을 했고 일본의 문학상까지 탈 뻔했다는 사실을 두고 자칫 친일파 운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1945년 5월에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피해 항일 근거지인 중국 연안(태항산 남장촌)으로 망명한 바 있다. 이러한 김사량의 인생 굴곡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을 가로지르는 동북아의 역사에 폭넓게 관련된 그의 문제적 삶을 보여 준다.
그는 비록 일본어 창작을 했지만, 일본 식민주의와 협력하는 조선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강한 연대감을 표시했다.
그는 <빛 속에>와 <천마>에서 조선적인 것을 지워 버리려는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포착한다. 이로써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불안을 야기하는 실체를 우회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김사량의 의도는 이런 인물들의 ‘위선과 비굴’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겁하고 모순된 존재들을 낳게 한 제국주의 문제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 북한에서는 <빛 속에>를 두고 ‘저항 의식이 적극적으로 표출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맞는 저항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일본어로 조선의 현실을 그렸다는 점은, 탄압을 피해 가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른바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에서 일본어 창작을 하면서 재일 조선인의 현실을 쓰던 그는 마침내 중국 연안으로 망명한다. 그에게 망명은 우회적 글쓰기(일본어 글쓰기)의 돌파구였다. 즉 저항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연안에서 항일 투쟁을 했던 얘기는 ≪노마만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조선의용군의 행적을 생생하게 기록한 문학적 사료다. 이 시기부터 그의 작품에는 소설가로서의 자의식보다는 혁명가로서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와서는 <칠현금>을 썼고 곧 한국전쟁이 터지자 ‘종군기’ 등을 썼는데 여기서는 혁명가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비록 모국어를 되찾았지만 북한 체제상 그의 문학이 개화하는 데는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북한에서 남긴 작품들을 보면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일제 말,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유리알 같은 정신’으로 날카롭게 직조하여 아쿠타가와상 후보에까지 오른 작가의 모습이 몹시도 그리워지는 것이다.
이렇듯 김사량은 일제강점기-해방-6·25라는 격랑에 몸을 실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문인이자 혁명가다. 이러한 삶의 굴곡은 남·북 어디에서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한에서는 일종의 월북 문인으로 간주되어 논의가 배제됐다. 북에서는 연안파라는 계보와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배척됐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씩 풀려 북한에서는 1987년에 ≪김사량 작품집≫이 나와 부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북한은 <빛 속에>를 두고 그 한계성을 지적하면서도 ‘우리 인민의 비참한 모습과 식민지 인텔리의 정신적 고민, 민족적 의식을 잘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남한에서도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한다. 특히 2000년대 들어 그에게 붙었던 친일 논란이 거의 해소됐다는 점은 그의 문학이 정당하게 평가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