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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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시대에 맞서는 진정한 서정의 힘

하찮은 존재들의 무한한 가치를 노래하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진솔한 언어와 빼어난 감수성으로 전통 서정시의 감동을 수많은 독자들에게 선사해온 김용택 시인의 신작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과 곁에 남아 있어주면 좋겠는 것들”(이철수, 추천사)을 애틋한 그리움으로 노래하며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과 그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존귀함을 일깨운다.

우주적 질서를 관조하는 고요한 사유의 세계와, 물질적 욕망에 포섭되어 삶의 진정한 가치와 참된 행복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 시대를 통렬하게 일갈하는 우수 어린 목소리는 김용택 시의 새로운 진경을 이룬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김용택 시인을 일컫는 하나의 이름이기도 한 「섬진강」 연작 4편이 새롭게 수록된 점이다. 시인의 첫 시집 『섬진강』(창작과비평사 1985)을 시작으로 한 「섬진강」 연작은 주지하다시피 한국 농촌시의 전형이자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성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번 시집에 추가된 「섬진강」 30~33에서 시인은 가난과 소외의 아픈 과거를 현재적 의미에서 반추하거나, 아름다운 섬진강을 앞에 두고 역설적으로 느끼는, 생의 고독과 팍팍해져만 가는 현실로 인한 심적 갈등을 그려낸다. 그 자체로도 명편들이되, 「섬진강」 연작의 의의를 지금 여기에서도 가져가려는 시인의 부단한 시적 갱신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바닥이 다 보이는 강물 속 돌멩이같이 해맑은 얼굴들,/봄볕은 가난한 얼굴들의 그늘까지 벗긴다./붕대 감은 손이 자꾸 욱신거린다./고향으로 다시 갈까./직장을 옮길까./가난한 사람들에게/가난이 약속된 땅은 서러운 땅이다./나도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찬다./돌부리가 걸렸는지 발가락이 아프다./이가 마주치는 이 가난,/돌멩이 끝이 보인다./흩어진 흙을 모아 다시 돌멩이를 덮는다./햇살 때문인지/이마가 뜨겁다.(「섬진강 30」 부분)

특별한 존재보다는 사소한 것들에 애정을 쏟는 김용택의 시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이기에 친근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시인은 지난날 “바닥없는 슬픔”(「섬진강 31」) 에 잠긴 채 “까만 돌처럼 쭈그려앉아 눈물을 흘”리던 “스무살 무렵”(「달콤한 입술」)을 떠올린다. 그 세월을 지나 어느덧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든 시인은 “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삶」)고 말한다.

“문득 모든 풍경들이 생소해지는 이 호젓한 외로움” 속에서 “괜히 수줍”고 “모든 것들이 처음처럼 부끄러워 죽겠다”(「말이 머문 입술」)고 고백하는 시인은 더는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삶」) 너그러운 마음으로 차분히 세상을 바라보며 “하찮은” 존재들의 “무한한 가치”를 새삼 깨닫는다.

이 저녁/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아무런 까닭 없이/남은 생과 하물며/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이 무한한 가치로/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준, 그리하여/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외롭지 않게 되었다.(「이 하찮은 가치」 부분)

자연의 섭리와 인생의 순리에 따르고자 하는 시인은 “세상을 한 손에 쥐고 무엇이든 한번의 터치로 끝”내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굴러갈 뿐”(「바퀴들은 쉬지 않는다」)인 “통제 불능”(「농사의 법칙」)의 자본주의 기계 문명에 맞서 결연한 목소리로 날카로운 비판 인식을 드러낸다. 시인은 “서정의 철조망을 넘어간 시들이/도시의 뒷골목에서/기아에 허덕”이는 삭막한 세상에 “눈물을 흘리는 기계”와 “비애를 느끼는 터미네이터를 만들고 싶다”(「바퀴들은 쉬지 않는다」)는 소망을 키운다.

물론 “그런 날이 오리라고, 쉽게 믿지 않”지만 “차례와 기다림과 일관성”의 법칙에 따라 “꽃 피던 시절,/꽃들이 흐르는 강물 소리로 왁지지껄 만발하던 시절”(「농사의 법칙」)을 되새기며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무생물이 생물을 낳고 생물이 무생물을 낳고/무생물이 무생물을 낳는다./불임이 없는 무서운 좀비들,/끝없이 새끼 치고 고립시켜 파괴하고, 오, 이런! 우울을 모르는/비생물적으로 매정하고 개체적인, 그래,/인류는 해석을 잃었다./다 알고 있듯 석유는 생명이 아니다./기계가 눈물을 흘리는 영화는 제국과 자본의 사기다.(「농사의 법칙」 부분)

시인은 또한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과 더불어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한다. “현실은, 받아들이라는 말이니, 무섭다.”(「뇌」) 하지만 또 “현실은, 바로 본다는 뜻 아니냐.”(「젖은 옷은 마르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옹골찬 자세는 그의 시적 출발의 또다른 면모이기도 하다.

“전율하던 그 하얀 공포,/치명적인 치욕, 무서운 현실/오! 시,/시였어.”(「달콤한 입술」)라는 처연한 고백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듯, “너는 어느 쪽이냐”는 질문으로 상징되는 현대사의 질곡과 치욕적인 현실에 맞서는 시인의 결기야말로 그의 시의 참된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내 몸에는 민간인인 아버지의 피가 흐른다./아버지는 시퍼렇게 멍든 어깨와 등짝에/선명하게 박힌 어지러운 짚자국들을/무덤으로 가져갔다./내 가슴에 박힌 아버지의 짚자국은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다./나는 나의 아들과 딸에게/어느 쪽이냐고 되묻지 않을 것이다./어둠 저쪽에서 후래시 불빛을/얼굴에 들이대며/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정조준된 총구는/오랜 세월 나를 향해/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너희들 검지손가락 끝마디에 방아쇠는 늘 걸려 있다. 그러니/어디/쏠 테면 한번 쏴봐라./나는 이제 떨지 않을란다.(「정면」 부분)

여기, 자본주의 현실의 모순에 맞서 그 ‘현실’을 이기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소낙비처럼 새하얀 점멸의 순간을 타고/지상에 뛰어내”리고 “제 몸을 부수며 절정을 넘기는/벼락 속의 번개 같은 손가락질들”(「필경」)이다. 현실의 고통에 맞서는 격렬한 고백과도 같은 시인의 노래는 부수면서 되살아나는 생명 그 자체이다. “나를 향해 직각을 넘어 휘지 않고/버”티면서 “혼돈의 거리”에서 “미련 없는 자의 냉혹한 뒷모습을 꿈꾸며” 살아가는 시인은 “생의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내 청춘의 적막과 고요의 발언”(「적막의 발언」)을 잃지 않았다.

첫 시집 『섬진강』이 우리 시, 나아가 한국사회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듯이, 그 이후로 발표한 숱한 작품들이 무수한 독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듯이, 이제 시인은 다시 한번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자신이 시로 다가가야 할 이들에게 새로운 걸음을 내디뎠다. 시를 통해 사회에 발언하고, 시로써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더욱 단단해진 김용택의 시는 이제껏 그래왔듯 여전히 새로운 울림으로 늘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자라다 만/철없는 시대적 응석이 나는 싫다./이별을 모르니 사랑을 알 리 없다./보수(補修)와 수선(修繕)은 보수(保守)를 낳고/철없는 아집과 미숙은 타락한 수구가 된다./시인의 꿈은 욕이다./사랑이 떠난 불쌍한 어머니의 젖꼭지를 놓아라./키스를 원하지 않는 너의 입술을,/내가 떠난 너의 눈동자를./나는/이제 싫다. 네가, 뜻 없는 네 슬픈 구도가 싫다.(「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부분)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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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1948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여 순창 농림고 졸업.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1985년 첫 시집 『섬진강』을 낸 이후 『맑은 날』(1986), 『누이야 날이 저문다』(1988 세번째 시집) 간행.
『꽃 산 가는 길』(1988 네번째 시집), 『그리운 꽃편지』(1989 다섯번째 시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1994),『강 같은 세월』(1995) 『그 여자네 집』(1998) 『나무』(2002) 『수양버들』(2009) 등의 시집과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1994)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1997)를 출간함.
1986년 『맑은 날』로 제6회 김수영문학상을, 1997년 제12회 소월시문학상을 각각 수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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