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인간의 냄새가 스미어 나왔다
하슬라의 아름다움, 와온 바다의 포근함, 익금의 반짝이는 모래알들…
바다와 땅이 만나는 포구마을, 그곳에서 찾아낸 삶의 아름다움
바닷가 마을을 여행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전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 베스트셀러 『곽재구의 포구기행』 출간 이후 15년, 다시 포구마을을 찾은 곽재구 시인이 신작 기행 산문집 『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를 출간한다. 독재와 억압으로 얼룩진 80년대, 포구마을을 떠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시를 써온 섬세한 시선과 한층 더 깊어진 문장을 담아낸 이 산문집은 시인이 2016년부터 2018년 초까지 월간 [전원생활]에 연재한 글 중 25편을 선별해 엮은 책이다. 10여 년 동안 한국의 촌락과 자연을 카메라에 담아온 최수연이 동행 취재하며 찍은 사진 52컷을 함께 수록했다.
어둠 속에서 램프를 받쳐 들고 환하게 웃는 손님 같은 하슬라(강릉)의 밤바다, 낮고 아늑한 순천의 와온 바다, 모래알들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 반짝이는 익금 바다 등 시인이 전하는 포구마을의 풍경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정화시키는데, 시인은 자연뿐만 아니라 마을의 불빛, 우연히 만난 포구 사람들의 삶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바닷바람 맞으며 부지런히 일해 자식들을 키워낸 어부와 선장, 귀농하여 학교를 만들거나 동화를 쓰며 새롭게 꿈을 키우는 사내, 머리에 땀수건을 질끈 묶고 웃으며 경운기를 모는 베트남 아낙, 시인이 되고 싶은 아이, “아 몰라요”만 반복하며 수줍게 웃는 스님 등 시인은 사람들에게서 넓고 빛나는 희망을 찾아낸다.
전국 곳곳의 해안, 섬과 만 33곳을 찾아가 풍경과 사람 이야기를 담은 이 산문집에서 시인의 여정은 자유롭고 따뜻하다. 40여 년을 꿈꿔온 격렬비열도 방문이 가능해졌을 때의 여행길에는 가슴 뛰는 설렘이 있고, 이십 대 때 살가운 인연을 맺은 할머니의 흔적을 찾아 떠난 영덕 대게길에는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친구의 고향인 군산 째보선창을 걸으며 백합조개를 캐던 친구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보거나, 감명 깊게 읽은 동시의 원작자를 찾아 방문한 넙도초등학교에서 오래전의 꿈 하나를 이루기도 한다.
절망뿐이던 이십 대에 처음 땅끝 마을에 들어선 시인은 어스름 속에서 빛나는 푸른 바다와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떠나는 배들, 하나둘 켜지는 마을의 등불들 속에서 한줄기 희망을 발견한 후 전국의 포구마을을 돌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인과 포구마을의 깊고 오랜 인연이 담긴 이 산문집은 고단한 삶 속에서 사랑하고 살아갈 힘을 찾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줄 것이다.
저 : 곽재구
郭在九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통해 대중에게 한발짝 더 다가선 시인. 이방인의 머리 속에, 고만고만한 배들이 들고나는 포구의 어스름은 스산함이나 적막함으로 각인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시인 곽재구는 먹빛 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돌리는 거친 사내들의 왁자함이나 마치 등대처럼 노란 불빛을 밝히고 있는 여염집을 바라보며 어둠을 감싸고 있는 '인간의 따뜻함'을 발견해낸다.
『사평역에서』는 곽재구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이야기들로 가난한 냄새가 흠뻑 배어 있다. 암울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동명동 청소부, 중동에 간 요리사, 창녀, 선생님, 용접공, 자전차포 점원 등-이 그의 시들의 주인공이다. “송화처럼 탄재가 날리는 용산역에서 새벽 김밥을 팔고” “가까운 고향도 갈 수 없는” 처지에 “일 년 반 동안 세 번을 이사”하기도 하는 그들에게 세상은 고되고 힘겹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에 대하여 노래하다가도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올라 오지 않는/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절망에 대하여」)며 희망을 싹 틔운다.
곽재구 시인의 시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비루한 그들의 삶에 피어 있는 조그만 들꽃을 발견해내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다. 『사평역에서』에서 시작하여 『서울 세노야』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실에서 억압 받는 삶에 대하여 서정적으로 노래해왔다. 80년대를 노래한 시들은 많다. 80년대를 겪은 이들에게 분노는 `근본 감정'이다. 그 분노를 비판 의식으로 끌어내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야 사회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를 노래했던 많은 시들은 그저 분노에 찬 절규와 외침으로 끝나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때 곽재구 시인의 시들은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분노는 아름다운 시어들을 통해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남루한 현실, 힘겨운 현실을 노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현실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는 어쩌면 더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을/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물 먹은 풀꽃 한 송이/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평역에서』에서는 이제 막 시인의 길에 들어선 젊은 글쟁이의 현실에 대한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사랑의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용접공인 동생이 건네는 때묻은 만 원권 지폐 한 장에, 팔 년 만에 졸업하는 대학과 어머니가 사 들고 오는 봉지쌀에 묻은 가난을 외면할 수 없는 젊은 글쟁이였다.
시집『사평역에서』(1983)『전장포 아리랑』(1985)『한국의 연인들』(1986)『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년) 등과 기행산문집『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1993), 창작장편동화『아기참새 찌꾸』 (1992) 등을 펴냈다.
사진 : 최수연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으며 ‘논’, ‘흐름’, ‘소’를 주제로 한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에세이 『논, 밥 한 그릇의 시원』 『소, 땅과 사람을 이어주던 생명』 『유랑』을 출간했다. 현재 [전원생활]의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