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마존 역사 분야 베스트셀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인디언 기록문학의 걸작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 현대 환경 운동에 불을 지폈다면,
이 책은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미국의 약탈 행위를 대중에 알렸다”
_햄프턴 사이즈(소설가)
1970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1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500만 부 이상 판매된 인디언 기록문학의 걸작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가 복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6년에 처음 번역되어 소개된 후 네 곳의 출판사를 거치며 거듭 출간될 만큼 많은 독자의 기대와 성원을 얻었다. 최근 국내 저작권 계약이 만료되어 기존·예비 독자들이 크게 아쉬워했고 나아가 조만간 다시 복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이 많았다. 이에 한겨레출판은 기존 표지에 변화를 주고 본문의 잘못된 편집을 새롭게 다듬어 복간하였다. 1860년에서 1890년대까지 서부 개척기의 미국은 황금과 마차와 총잡이의 시절이었다. 인디언들은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그들의 땅으로 들어온 백인들은 황금을 위해 땅을 반드시 차지해야 했다. “신은 진정 우리에게 축복을 내렸다. 황금은 여기 우리의 발치에 널려 있어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미군 소령의 말이 당시 백인들의 신념을 대변한다. 땅을 빼앗기 위해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명백한 운명’이란 유럽인과 그 후손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지배 민족으로서 당연히 인디언의 땅과 삼림과 광산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양도 서류에 백인 식으로 서명을 했다. 백인들이 땅값으로 건넨 것은 인디언들이 신기해하는 ‘구슬 몇 개’가 전부였다. 그 후 30년간 인디언들의 씨를 말릴 때까지 백인들은 계속 거짓말로 땅을 차지했고, 꾸준히 백인의 말을 믿었던 인디언들은 결국 멸족당했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백인들의 끝없는 탐욕이 일으킨 인디언 학살 전쟁에서 마누엘리토, 붉은구름, 검은주전자, 앉은소, 매부리코, 작은까마귀, 조셉, 제로니모 등 진정한 평화주의자이자 자연보호주의자였던 인디언 전사들이 부족을 구하기 위해 치렀던 수많은 투쟁을 다룬 기록문학이다. “백인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지역의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으며 어느 부분도 점유할 수 없다. 또한 인디언의 동의 없이는 이 지역을 통행할 수 없다(1868년 조약)”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채 수없이 파기된 조약에 관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디언의 언어와 구술을 최대한 살려 인디언의 입장에서 서부 개척 시대를 돌아보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전쟁의 위협과 기후 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생명과 대지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인디언에게 배워야 할 때
이 책을 관통하는 주요 이념은 명백하면서도 급진적이다. 앵글로 아메리카인이 서부를 ‘획득’했다면 그로 인해 ‘사라진’ 아파치, 네즈페르세, 유트, 샤이엔, 수우, 나바호족의 입장은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 현대 환경운동에 불을 지폈다면,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같은 방식으로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약탈행위의 진상을 일반 대중에게 알렸다. _햄프턴 사이즈(소설가)
특히 미국인들이 들소 가죽만을 위해 들소를 몰살시키는 행위는 인디언들에게 분노를 넘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인간과 동물, 즉 생명에 대한 백인들의 무도한 약탈과 파괴는 오늘날 인류 최대의 문제가 되어 있는 환경 파괴가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가를 상기시킨다. _옮긴이 후기 중에서
네즈페르세족 추장 조셉은 이렇게 한탄한다. “우리는 위대한 정령이 만물을 만든 그대로 놓아두지만, 백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강이든 산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 버린다.” 훙크파파족 최고의 전사 중 한 명이었던 ‘앉은소’는 왜 백인들이 가난한 동족을 버려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딜 가나 졸졸 따라다니는 남루한 백인 아이들에게 자기가 번 돈을 거의 다 나눠주면서 이렇게 갸우뚱거린다. “백인들은 뭐든 다 만들어 내면서도 그걸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군.”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참혹한 전쟁이 심화·확산되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넘어 극우주의가 득세하며 글로벌 정세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급격한 환경 파괴로 인해 우리는 기후 위기를 넘어 기후 재앙을 목전에 두었다. 과연 우리는 이대로 괜찮을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아메리카에서 사라진 인디언들의 수난사, 기만과 날조로 점철된 미국의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 이면에는 국가와 인종, 문화를 넘어 공존과 연대를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브룰레 수우족의 족장 ‘점박이꼬리’의 말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선사한다.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은가. 말썽이 생겼을 때는 쌍방이 무기 없이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평화로운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인디언 추장들의 생생한 육성
“백인들은 걸핏하면 우리 고유의 생활을 버리고 자기네처럼 살게 만들려고 한다. 농사를 지으라느니, 열심히 일하라느니. 인디언들은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가 백인들에게 인디언처럼 살라고 했더라면 그들도 반발했을 것이다. 왜 바꿔 생각하지 못하는가?”(샌티 수우족의 큰독수리)
“내가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일들이 이 땅에서 수없이 벌어졌다. 백인들은 우리 땅을 가로질러 갔다. …백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핏자국밖에 남은 게 없다.”(오글라라 수우족의 붉은구름)
“나도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나는 부족의 목소리이다. 그들의 마음을 나는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들은 나에게 백인의 권리를 거부한다. 내 피부는 붉지만 심장은 백인과 똑같다.”(모도크족의 킨트푸애시)
“부당한 일을 수없이 당했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있다. 나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 우리는 다시 화친을 맺으려 하고 있다. 나는 친구들의 충고를 따르기는 하겠지만 치욕스러운 심정은 이 땅을 덮고도 남는다. 한때 나는 끝까지 백인의 친구로 남은 유일한 인디언이라고 자부했지만 백인들이 몰려와 우리 처소를 뒤엎고 말과 모든 재산을 빼앗아갔으니 이제는 더 이상 백인을 믿기 어렵게 되었다.”(남부 샤이엔족의 검은주전자)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이 우리에 갇혀 아무 데나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고서 만족하기를 바란다면 강물이 거꾸로 흐르기를 바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네즈페르세족의 조셉 추장)
“이 전쟁은 우리 땅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거저 뺏으려 쳐들어온 자들, 이 땅에서 수없이 못된 짓을 저지른 큰아버지의 자식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우리가 바란 것은 다만 내 땅에서 평화롭게 살며 우리 부족의 행복과 안정을 지키는 것뿐이었지만 큰아버지는 우리를 죽이는 것에만 눈이 벌게진 군인들로 이 땅을 가득 채웠다.”(브룰레 수우족의 점박이꼬리)
“오래전에 이 땅은 우리 아버지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강에 가보면 강둑에 미군들의 진지가 보인다. 미군은 내 나무를 자르고 내 들소를 죽이고 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은 터질 것 같다. …백인은 먹지도 않으면서 들짐승을 부질없이 죽일 만큼 철부지가 되었나. 우리 홍인종이 들짐승을 죽일 때는 굶어죽지 않으려고 부득이 죽이는 것이다.”(카이오와족의 사탄타)
“당신들은 집을 지어주고 보건소를 만들어줄 테니 주거지역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원치 않는다. 나는 바람이 거칠 것 없이 불어오고 햇빛을 가리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울타리도 없고 모든 것이 자유롭게 숨 쉬는 곳이다. 벽 안에 갇혀서 죽기보다는 거기서 죽고 싶다.”(얌파리카 코만치족의 열 마리곰)
■ 추천의 글
• 독창적이면서 훌륭하다. 심금을 울린다.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다. _《뉴욕타임스》
• 장엄한 인디언들의 사진이 들어 있는 매혹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기록! _《월스트리트저널》
• 이 애타고 가슴 저미는 책을 읽다 보면 정말로 누가 야만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_《워싱턴포스트》
• 이 책만큼 나를 슬프고 수치스럽게 한 책은 없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 우리가 진정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이번만큼은 깨닫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_《뉴스위크》
•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 현대 환경 운동에 불을 지폈다면, 이 책은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미국의 약탈 행위를 대중에게 알렸다. _햄프턴 사이즈(소설가)
• ‘미국 인디언 멸망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백인들이 끝없는 탐욕으로 일으킨 인디언 학살전쟁에서 마누엘리토, 붉은구름, 검은주전자, 앉은소, 매부리코, 작은까마귀, 조셉, 제로니모 등 진정한 평화주의자이자 자연보호주의자였던 인디언 전사들이 부족들을 구하기 위해 치렀던 수많은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_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 철저한 구술 기록을 바탕으로 인디언들의 멸망 과정을 손에 잡힐 듯 보여 주는 기록문학의 걸작! _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 책 속에서
비극의 역사는 신세계 사람들에게 인디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된다. 유럽의 백인들은 그 이름을 조금씩 다르게 인디엔, 인디애너, 인디언 등으로 발음했다. 홍인종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살바도르 섬의 타이노족은 손님을 대접하는 풍습대로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에게 선물을 주고 예의를 갖추어 대접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아주 평화롭고 유순해서, 전하께 맹세하오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나은 백성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며, 말은 부드럽고 상냥할 뿐 아니라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벌거벗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예절 바르고 훌륭합니다.”
남북전쟁 전 10년 동안 15만 명이 넘는 백인 이주자들이 ‘영구적인 인디언 경계선’의 왼쪽 옆구리를 무너뜨리고 샌티족 땅으로 밀고 들어왔다. 기만적인 두 번의 조약 때문에 삼림 수우족은 그들의 땅을 90퍼센트 이상 양도하고 미네소타 강 연안의 좁은 터에 몰려 살았다. 주재소관리와 상인들은 도살된 들소의 시체 주위를 맴도는 독수리처럼 샌티족 주위로 몰려들어 그들이 땅을 포기한 대가로 지급받던 연금을 사기쳐서 빼앗았다.
큰독수리는 말했다. “많은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거칠게 대했다. 핑계야 있겠지만 인디언들 생각은 달랐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보면 ‘나는 너보다 낫다’라는 태도를 보였다. 인디언들은 이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야 있겠지만 다코타 수우족은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몇몇 백인 남자들은 인디언 여자들에게 욕을 퍼붓고 수모를 주었다. 그런 행위는 분명히 변명의 여지가없다. 그 때문에 많은 인디언이 백인을 싫어하게 되었다.”
개병대는 떠돌아다니는 말과 노새를 한 마리씩 잡아서 몰고 가는 중이었는데, 시빙턴의 부하들은 그 짐승들을 어디서 잡았는지 설명도 듣기 전에 사격을 가해왔다. 이 교전 뒤 시빙턴은 더 많은 병력을 보내서 시더 블럽스 근처의 샤이엔 마을을 습격해 여자 두 명과 어린아이 두 명을 사살했다. 5월 16일에 검은주전자 마을을 공격한 포병대원들도 캔자스에서는 작전을 벌일 권한이 없는, 덴버의 시빙턴 부대원들이었다. 지휘관 조지 이어(George S. Eayre) 중위는 시빙턴 대령에게 “언제 어디서든 눈에 띄는 샤이엔은 가리지 말고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런 사건이 계속된다면 평원 전체에서 전면전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윌리엄 벤트와 검은주전자는 의견을 같이했다. “백인과 전쟁을 하는 것은 내가 의도하는 것도, 바라는 바도 아니다. 나는 우호적이고 평화롭게 지내고 싶고 나의 부족민들도 그렇게 살게 하고 싶다. 백인과 싸울 수도 없다.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검은주전자는 털어놓았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샤이엔, 아라파호족과 다른 쪽의 수우족 간에 포위망이 너무 좁혀져 있어서 빗발 같은 화살에 인디언들이 서로 다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미군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개 한 마리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빠져나오자 수우족 전사 하나가 그 개를 잡으려고 다가갔다. 그때 샤이엔 전사 불량배(Big Rascal)가 “그놈을 놓아주지 마라!” 하고 소리치자 누군가가 즉시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것이 백인들이 ‘페터먼 학살’이라고 부르는 전투다.
인디언들은 이 싸움을 ‘100명을 죽인 전투’라고 부른다.
손실은 인디언 쪽도 심각했다. 거의 20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추위가 심해서 인디언들은 부상자들이 얼지 않도록 임시 진지로 후송했다. 다음 날 귀가 먹먹할 정도의 눈보라에 발이 묶였지만, 날씨가 개자텅 강에 있는 마을로 돌아갔다.
아라파호족의 노란곰(Yellow Bear)도 부족을 콥 요새로 데리고 오기로 동의했다. 며칠 뒤 토사위라는 코만치 추장이 부족을 이끌고 투항해왔다. 토사위는 셰리던 앞에 나와서 눈을 빛내며 자기 이름을 말하고는 떠듬떠듬한 영어로 두 마디를 보탰다.
“토사위, 좋은 인디언.”
셰리던 장군이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불멸의 말을 내뱉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다 죽었어.”
이 말은 그 자리에 있던 찰스 노드스트롬 중위에 의해 옮겨져서 미국 사람들의 유행어가 되었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1875년 봄까지 대부분의 아파치족은 인디언 주거지역에 갇혀 지내거나 멕시코로 도망쳤다. 3월에 크룩 장군은 애리조나에서 플래트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파치족보다 더 오래 인디언 주거지역의 삶을 감내해왔던 샤이엔족과 수우족이 반란의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아파치 지역의 사막과 산봉우리 그리고 언덕 위에는 강요된 평화가 내려앉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평화는 그들을 피에 굶주린 야만인이 아닌 인간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파치의 신뢰를 얻은 두 백인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불가지론자인 톰 제퍼즈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존 클럼은 낙관주의자였지만 그들도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아파치의 권리를 보호해준 남서부 백인들의 눈에도 미래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카이오와 사람들은 마술사가 동족의 생명을 빼앗는 데 마술을 사용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불렀으리라고 얘기했다. 그로부터 3년 뒤 형무소 의무실에서 여위어가던 사탄타도 높은 창문에서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자유를 찾았다. 같은 해 말라리아에 걸려 신음하던 외로운늑대는 실 요새로 돌아오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1년도 못 되어 죽었다.
위대했던 추장들은 가버렸다. 강대했던 카이오와족과 코만치족의 힘은 스러졌고, 그들이 구하려고 애쓰던 들소도 사라졌다. 이 모든 일이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났다.
미친말은 그날 밤, 즉 1877년 9월 5일 밤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 다음 날 새벽 미군은 추장의 주검을 그의 부모에게 넘겼다. 그들은 아들의 시신을 나무상자에 넣고 말이 끄는 트래보이에 붙들어 매고 점박이꼬리 주재소로 실어가 단 위에 올려놓았다. 풀이 마르는 달이 다 가도록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상객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잎이 떨어지는 달에 가슴 찢어지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수우족은 네브래스카를 떠나 미주리 강의 새 주거지역으로 이주해야 한다.”
1877년 건조하고 상쾌한 가을날 인디언들은 미군의 감시 아래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북동쪽의 불모지를 향해 귀양길에 올랐다. 도중에 몇몇 지파가 행렬에서 빠져나가 북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캐나다로 도망가 앉은소와 합류할 작정이었다. 도망가는 사람들 중에는 아들의 심장과 유골을 간직한 미친말의 부모도 있었다. 그들만이 아는 장소, 운디드니(Wounded Knee)라고 불리는 조그만 샛강에, 수우족 말로 ‘창크페 오피 와크팔라’ 근처 어딘가에 그들은 자식의 뼈를 묻었다.
로빈슨 요새에 포로로 잡혀 있던 과부와 고아들 그리고 남은 전사들은 워싱턴 관료제도의 지체로 여러 달 미뤄지다가 파인 릿지의 붉은구름 주재소로 옮겨져 무딘칼과 합쳤다. 다시 몇 달 기다린 뒤 키오 요새의 샤이엔족에게 텅 강 주거지역이 주어지고, 파인 릿지에서 몇 사람으로 줄어든 무딘칼 일행은 그제야 부족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샤이엔족으로부터 모든 힘을 앗아간 후였으니.
샌드 크리크 학살 이래 운명은 이 아름다운 부족을 망쳐놓았다. 부족의 씨는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남쪽에서 떠나기 전 어느 전사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북쪽으로 간다. 싸우다 죽더라도 우리 이름은 부족민들 가슴속 깊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들을 기억하거나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아름다운 부족은 사라져버렸으니.
1908년 미국 루이지애나주 앨버타에서 태어나 2002년 사망했다. 미국 남서부의 유전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본명은 도리스 알렉산더 브라운(Dorris Alexander Brown). 1928년 아칸소 주립교대에 입학해 역사를 공부했다. 공황기에 워싱턴으로 이주,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1935년 도서관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42년에 소설 《현수막을 높이 흔들라Wave High The Banner》를 출간하며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일리노이 대학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은퇴할 때까지 같은 대학교 농대 도서관에서 사서로 재직했다.
일생 동안 25권 이상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미국 서부의 역사를 다룬 논픽션이다. 특히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한 회의 기록과 인디언들의 구술을 인용해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로 기록문학의 한 본보기를 남겼다.
전북대학교 영문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원대 교수를 거쳐 전북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옮긴 책으로 《판초빌라 전기》, 《제로니모 자서전》, 《서양 문명이 날조한 야만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