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맞선을 망쳐 줘.” 자매 같은 친구의 부탁이었다. “이 바닥에서 아주 유명한 바람둥이래. 매일 낮이고 밤이고 호텔을 들락날락한다더라. 그것도 늘 다른 여자랑!” 소중한 친구가 그런 남자와 결혼하게 둘 수는 없었다. 희수는 기꺼이 연극에 동참하기로 했다. 도강현을 거쳐 간 수많은 여자 중 한 명을 연기하는 것으로. 그런데. “나 당신 아이 가졌어! 어떻게 할 거야? 책임져!” “그러지 뭐.” 강현은 소문의 바람둥이답게 태연했다. “그쪽 이름이 뭡니까? 나랑 잤다며. 그런데 내 기억에는 없어서.” “다시 자 보면 기억이 나려나.” 심지어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희수는 도망쳤다. “그렇게 살지 마! 이 바람둥이야!” 그녀가 아는 가장 심한 욕을 던지고. “연희수 씨, 면접 이어서 진행해 볼까요?” 그런데 도강현을 다시 만났다. 그것도 면접 자리에서. *** “어젯밤은…… 실수였어요.” “그간 소중히 간직해 온 내 순결과 정절을 빼앗고 실수였다고? 연희수 씨, 상처 주네?” 강현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어요.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나. 이게 다 연희수가 착해서 벌어진 일이더라고.”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 여자. 강현에게 연희수는 호구, 그 자체였다. 그래서 강현은 이 괘씸한 호구를 구원하기로 했다. “앞으로 연 대리가 착한 일을 할 때마다 벌을 줄 겁니다.” 물론, 침대에서 받게 될 벌이었다. “한 번 착하게 굴어 봐요. 어떻게 되나.” 음험한 육욕에 잠식된 까만 눈동자를 보며 희수는 잘게 떨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만 착하게 굴도록 해." 웃는 것도, 다정한 것도, 내 앞에서만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