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많은 철학자들은 맹인 심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인식에 관한 이론과, 감각에서 판단으로의 이행 과정에 중심이 되는 추상적인 문제가 시력을 회복한 맹인의 반응을 연구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디드로가 맹인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대단히 실증적이며 실험심리학적이다.
이 책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자연의 경이로움’은 허물어지고 신은 존립의 여지가 사라졌다. 인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우리의 뇌리에 반영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사람과 맹인이 동일하게 사물을 인식한다.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고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경험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다. 디드로는 결국 ≪맹인에 관한 서한≫에서 완전히 유물론적인 인식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이 ≪맹인에 관한 서한≫은 ≪자연의 해석≫(1754)에서 ≪달랑베르의 꿈≫, ≪생리학 요강≫(1774∼1781)으로 이어지는 디드로 사상의 발전 과정의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맹인 연구의 선구자 디드로
디드로가 맹인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대단히 실증적이며 실험심리학적이다. 물론 오늘날의 실험심리학 방법론에 비하면 지극히 초보적이지만, 디드로의 방법론은 훗날 실험심리학이 발전하게 되는 방향과 일치한다. 맹인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른 심리를 지녔다.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으로 맹인을 접해서는 그 심리, 사고방식을 포착할 수 없다. 디드로는 뛰어난 심리 분석가로서 맹인을 접하고 여러 가지 경험담을 듣는다. 캉(Caen)대학의 맹인 문학 교수인 피에르 빌레(Pierre Villey)는 맹인의 정신과 인격, 윤리관이 볼 수 있는 사람과 다르다는 디드로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디드로가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에게 적합한 대처 방법을 예견한, 맹인 심리 연구의 진정한 선구자였다며 심리 관찰자로서 그의 명민함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