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 (상): 역대 주석본 비교 고증 완역판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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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주三家注’를 넘어 최신 연구 성과까지

『사기』의 모든 주석을 망라한 결정판!


그동안 국내『사기』 번역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등 ‘삼가주三家注’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었다.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 또한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다. 


글항아리에서 펴낸 이번『사기열전』 상·하는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삼가주三家注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같이 검토함으로써 풍부한 주석의 세계를 선보였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한 뒤에 가장 옳다고 생각한 내용을 번역에 반영했으며, 아울러 독자들도 다양한 학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분량 또한 방대해졌다.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런 부분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때로 발언이나 행동의 주체가 뒤바뀌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번 번역에서는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한나라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사기’는 『태사공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태사공서』는 당시에 ‘사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사기』가 사마천이 지은 저작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아마도 후한後漢 후기부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범위한 연구 성과 반영


20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사기』의 판본은 상당히 많다. 『사기』의 각본刻本은 북송 때 시작되었고, 이후에 가장 유명한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합친 ‘삼가주합각본三家注合刻本’이 출현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평론을 숭상하는 기풍에 따라 평림본評林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 평론은 구절과 단락을 나누어 평론한 것도 있고 편 전체를 평론한 것도 있다. 청대에 와서는 송나라 판본을 보충한 백납본百衲本이 출현했는데, 완전하지 못한 잔본殘本들을 모아 완성시킨 것으로 백납본白衲本 『사기』라 부른다.

이후 현대에도 많은 『사기』가 간행되었지만 이번 번역에서 역자는 2013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이십사사수정본點校本二十四史修訂本 『사기』’를 이번 번역 작업의 저본으로 삼았다. 이 책은 1959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 『사기』와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5)에 금릉서국에서 간행한 『사기집해색은정의합각본史記集解索隱正義合刻本』 130권을 저본으로 삼아 『사기』 문헌학의 권위자인 자오성췬趙生群 난징사범대학 교수의 교감과 수정을 거쳐 펴낸 것이다. 이 판본은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간행된 것으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판본들의 오류를 교정하고 수정한 ‘수정본 『사기』’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각 「열전」 말미에 ‘교감기’를 통해 본문의 오류를 수정한 내용을 소개했는데, 역자는 이번 번역본에서 이를 참고하고 인용할 때 주석에서 ‘교감기’라 하지 않고 ‘수정본’이라고 밝혀두었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사기』 번역본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삼가주三家注’(남조南朝 송宋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특히 『사기』의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이러한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넘어 ‘삼가주’의 중요한 주석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들의 견해를 주석을 통해 설명하며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삼가주’의 내용과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비교하며 출처를 밝혔다. 역자가 참조한 대표적인 저작물은 명대 능치륭凌稚隆의 『사기평림史記評林』을 비롯해 청대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가운데 「독사기잡지讀史記雜志」, 곽숭도郭嵩燾의 『사기찰기史記札記』, 그리고 근대의 저작물인 추이스崔適의 『사기탐원史記探源』 , 천즈陳直의 『사기신증史記新証』, 일본 학자인 다키가와 스케노부瀧川資言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 등과 왕수민王叔岷의 『사기각증史記斠證』, 현재 『사기』 연구의 최고 전문가라 평가받는 한자오치韓兆琦의 『사기전증史記箋證』(2015년 수정판), 그리고 장다커張大可, 딩더커丁德科의 『사기통해史記通解』(2015)를 중점적으로 참고하고 인용했다. 이들 외에도 번역 중 검토했던 주요 자료 목록을 참고문헌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사마천의 오류 집중 분석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의 출판물에서는 이러한 오류 부분에 대한 지적과 설명,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견해가 존재할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검증되고 타당한 견해들을 소개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채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오류 이외에 『사기』에는 또한 『전국책』 『한서』 등과 비교해 내용이 상이하거나 시대 순서의 오류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 또한 『전국책』 『한서』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소개했고, 『전국책』 『한서』와 관련된 많은 역사 저작에서 『사기』와 상이한 내용을 발췌하여 주석에 소개하고 각각의 오류를 검증하고 바로잡았다.

그 외에 사마천은 『사기』를 기술하면서 제자백가와 사서오경 등 여러 고대 저작물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했다. 글항아리판 이번 번역에서는 사마천이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 상이하거나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까지도 비교 검토하여 주석에 상세히 소개했다. 또한 국내에서 출판된 기존의 『사기』 번역서에서 심각한 번역 오류라 판단된 경우에는 이들 번역이 왜 오류인지 근거와 함께 바른 번역을 제시했다.

『사기』는 중국 최고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서 중국 역사의 고찰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심을 ‘천天’이 아닌 ‘인人’, 그리고 ‘민民’으로 더욱 구체화시켰으며 이들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증명했다. 또한 이들 평민 백성의 사적과 역할을 기술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혼란한 시대 상황과 공정하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분노했다.


About the author

중국 전한前漢 시기의 역사가. 공자의 『춘추』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사기』으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이자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무렵 하양夏陽(지금의 산시성 한청)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했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외웠고 이후 태사령이 된 부친 사마담을 따라 장안에서 살면서 배움의 폭을 넓혔다.

20세 때 천하를 견문하고 돌아와 몇 년 뒤 낭중郎中 벼슬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선 한 무제를 수행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때 다양한 제례를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기원전 112년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듬해 서남이(오늘날의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릉의 사건이 발생했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했다가 사마천은 부형의 참사를 당해 『사기』 저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궁형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은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사마천의 죽음(기원전 91년 무렵)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1991년 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부터 고전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학의 대가인 김도련 교수 밑에서 사서, 통감, 제자백가를 두루 읽었다. 졸업 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러시아연방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에 입학했다. 중국, 러시아(소련) 외교 분쟁사를 주로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한 뒤로는 현재까지 기업체에 근무하고 있으며, 동시에 고전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수호전』(전5권, 공역, 2012)과 『삼국지』(전6권, 2019) 등이 있다. 현재 중국 정사 자료인 『후한서』와 『사기』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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