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구화된 신자유주의에 맞서 더 나은 삶을 향한 통합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문정신을 회복하고 인문학과 사회의 소통으로 학술체계를 쇄신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국내외 제도 안팎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활동의 성취와 한계를 오랜 동안 연구해온 경험에 기반해 검토, 공감과 소통의 보편성을 추출하고 창의적 발상을 더함으로써 긍정의 답을 제시한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 대학과 인문학의 위기라는 공동의 문제를 돌파할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쑨 거(孫歌) 중국사회과학원 교수와의 대담 또한 흥미진진하다.
제도와 운동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회인문학의 길
사회적 연결고리를 잃고 폐쇄적이 된 인문학의 위기, 대학의 위기가 논의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런 흐름은 신자유주의의 전방위적 압박 속에 가중되는 중이다. 대학은 자본주의 시장논리로 경영되는 지구적 규모의 관료제적 경영체가 되어가고 있다. 지식경제화 담론에 휘둘리면서 단기간에 연구·교육성과를 드러내도록 강요당하고, 국제경쟁력이라는 이름 아래 그 성과를 계량화하도록 요구받는다. 기존 가치와 제도의 결함을 보완해 더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찾는 인문학은 본연의 정신을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 이천년대 중반 이래 불어닥친 대중적 인문학 붐의 한켠에서 더욱 파편화되고 고립되어가는 제도권 인문학이라는 모순은 그런 훼손의 결과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이 “인문학의 사회성과 사회의 인문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비판적 학문활동”인 ‘사회인문학’(social humanities)이다. 이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단순결합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길을 탐구하는 종합적·체계적·실천적 학문인 인문학의 본성을 회복하고 인문학과 사회의 소통을 통해 학술체계의 쇄신을 꾀하는 가치지향적 과제이다. 사회인문학은 현실문제를 진단하는 하나의 관점이자 더 나은 대안을 찾는 학문연구의 자세며, ‘구체적 정세 판단을 역사적·사상적 과제와 결합해 우리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통찰하고 그에 비춰 실천하고자 하는’ 학문적 지향이다. 저자가 꼽은 사회인문학의 원칙은 소통(분과학문들 간의 소통, 국내외 학술 수용자와의 소통), 성찰(인문학이 사회적 산물임을 확인하는 학문의 역사에 대한 성찰, 사회에 대한 성찰), 실천(문화상품화가 아닌 사회적 실천성을 중시하는 학문적 실천)이다.
사회인문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학·한국학의 혁신
1부는 사회인문학의 관점에서 저자의 전공분야인 역사학과 한국학의 재구성을 전망한 글들이다. 학문의 분과화에 맞서 파편적 지식을 종합하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감각을 기르며, 현재의 삶에 대한 비평의 역할을 하는 총체성 인문학, 즉 학문 그 자체의 회복이 사회인문학이 지향하는 바이다. 저자는 이 사회인문학을 역사학의 혁신작업에 접목해 바람직한 역사학의 상으로 ‘공공성(公共性)의 역사학’을 그려낸다. 이는 우리 현재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는 역사로, 상상력과 공감으로 만나는 친밀성을 특징으로 한다. 역사의 이야기성을 회복해 비전문적 대중과 소통하는 역사, 역사학 본연의 현실비평적 성격에 충실한 역사,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감각을 기르는 인문교양으로서 역사, 전문가만이 아니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개방성 또한 공공성의 역사학의 특징이다. 제도권과 생활현장에서, 전문연구자와 일반대중 모두가, 사회 현실과 역사적 사건을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 기록하는 자기갱신의 학술활동인 것이다. 사회인문학을 접목한 공공성의 역사학의 이런 특징은 역사학만이 아니라 여러 분과학문에 적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 성과들이 서로 어우러질 때 사회인문학의 구현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공공성의 역사학은 실제 생활에서 ‘공감’과 ‘비평’의 방식으로 구현된다. 역사로서의 과거에 대한 실감과 과거를 산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확대하는 ‘공감적 재구성’을 통해 역사적 경험을 현실과 소통시키고, 현실에 대한 비평능력을 향상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카또오 요오꼬(加藤陽子)의 『그래도 일본인은 전쟁을 선택했다』(朝日出版社 2009)를 그런 상호작용의 예로 든다. 일본 독자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 책이 일본현대사를 공감도 높게 서술함으로써 전쟁 선택의 역사적 맥락을 실감나게 이해시킨 성과가 있지만, 한편으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방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지적한다. 역사의 공감적 재구성은 비평성과 결합할 때만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가능케 하며, 동아시아인의 역사화해에 기여할 새로운 역사학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합학문으로서의 한국학 재구성에 대한 구상은 ‘지구지역학(glocalogy)으로서의 한국학’ 개념으로 나타난다. 지구지역학은 지방적·지역적·지구적인 것을 하나의 차원으로 파악하는 시각이자 연구방법론이다. 이는 서구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동시에 한국이라는 공간성을 중시하면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지향을 갖는다. 이런 특성으로 해서 지구지역학 개념은 한국학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저자는 그 실례로 세계주의를 전망하면서 오늘의 현실에 걸맞은 지역주의에 착안한 인천학(Inchonology)과, 국경에 갇힌 일국적 시각을 넘어 양안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에 새롭게 접근하는 데 풍부한 시사를 던지는 대만의 진먼학(金門學, Quemology)을 들고 여기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한국학의 통합적 성격은 일찍부터 주목받았고 이를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인 인하대 BK사업단의 ‘동아시아한국학’의 이념적 지향과 제도화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저자는 한국학의 사회인문학적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색한다. 정부와 대학의 각종 지원 속에 또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제도화되어 연구-재생산체계를 갖추는 방식을 넘어서려면 한국학 변혁의 동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베트남·대만·미국 등을 포함한 국내외 한국학 연구인력들 간의 광범위한 연구제휴망을 짜고 공동사업을 추진하며 후속세대에 학회를 적극적으로 개방함으로써 개방과 참여를 통한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다. 무엇보다, 지구화된 세계의 일부인 한국의 현실이 제기하는 의제를 탐구함으로써 동아시아와 세계사적 과제에 동시에 부응하는 것이 한국학의 변혁의 동력임을 역설한다.
새로운 동아시아사·동아시아학의 구상
2부는 동양사학과 중국(사)학을 중심으로 한국에 근대학문체계가 성립한 이래 제도 안팎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성취와 한계를 검토하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제안하는 글들이다.
청일전쟁 이후 서구 역사학을 수용한 일본의 ‘독자적 학문’으로 탄생한 동양사학은 태평양전쟁 패배를 계기로 사실상 폐기되었으나,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는 역사학 3분과(동양사·서양사·국사)의 관행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동방’국가들 간의 문화교류사를 복원하여 ‘동방학’을 정립한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없애고 해양사관에 입각해 자국의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는 대만과 달리, 경성제국대학과 일제 유학파 학자들이 주류를 이룬 한국은 동양사학 분과를 고수하면서 실증에 치우친 학풍으로 독창적 문제제기를 제약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저자는 일본·한국·중국·대만 학술제도의 역사적 궤적을 검토하면서 일본발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인 동양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비판적·역사적 동아시아학’을 제기한다. 국가를 분석단위로 한 종래의 지역학을 지양하고 역사학과 문화연구의 강점을 결합한 이 새로운 학문은 세계사와 소통하는 동아시아사의 가능성을 열어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한국 동양사학계의 원로 고병익(高柄翊)이 선구적으로 주창한 학문간 연구의 개방성과 한국사와 소통하는 동아시아사라는 발상을 동양사학 극복의 소중한 자산으로 연결하고, 한국 중국학 연구에서 각기 제도와 운동으로 표상되는 민두기(閔斗基)와 리영희(李泳禧)의 성취와 한계를 검토하여 제도로서의 학문과 운동으로서의 학문의 긴장과 영향을 분석한 작업 역시 비판적·역사적 동아시아학·중국(사)학의 가능성을 탐색한 것이다.
한국사와 소통하는 동아시아사 구성의 키워드는 ‘소통적 보편성’이다. 각국 역사에서 소통을 가능케 하는 보편적 요소를 발견하고,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공감과 상상력을 통해 동아시아인들에게 보편성을 갖는 동아시아사 서술이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민두기의 ‘자아확충의 동아시아사’와 ‘자아충실의 동아시아사’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저자는 그간 역설해온 ‘이중적 주변의 시각’을 제시한다. 서구중심 세계사에서의 동아시아라는 주변과 동아시아 내 위계질서에서의 억눌린 주변을 동시에 고려해야만 연대와 갈등의 동아시아사가 전모를 드러낸다는 관점이다. 시마무라 떼루(島村輝), 조희연 등의 최근 연구성과와 함께 저자는 소통적 보편성의 예로 동아시아인의 8·15에 대한 서로 다른 역사경험을 분석한다. 해방·종전·패전 등으로 표상되는 한중일의 역사적 기억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그에 내재한 보편성(일본제국주의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을 통찰하는 일, 평화에 대한 동아시아인의 보편적 바람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소통적 보편성을 가진 동아시아사 서술인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는 지식인 연대의 가능성
3부에 수록된 쑨 거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교수와의 대담은 대학사회와 학문의 위기에 대응하는 동아시아 지식인의 성찰과 실천에 대한 현장중계다. 익히 알려진 대로 쑨 거는 전공과 분과학문체계의 틀을 뛰어넘는 독특한 행보로 동아시아적 사유의 새 길을 내온 선구적 학자이다. 제도 안과 밖의 학문활동을 겸하고 있는 두 지식인은 자신들의 구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현행 제도권 학문의 업적중심주의·성과주의와 계량적 평가방식, 인용빈도수와 실용성을 중시하는 학문풍토를 비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형식적인 학과 통폐합에 그침으로써 ‘거짓된 학과 뛰어넘기’가 되거나, 축적된 지식의 부족으로 ‘거짓문제’와 ‘거짓지식’을 낳을 위험 또한 경계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동아시아 사상자원을 활용한 보편적 통찰, 생활과 학술을 결합한 중범위 이론(theories of the middle range), 사회인문학적 전환을 통한 사회변혁에 대한 성찰 속에서 제도와 운동의 경계를 허물며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사회인문학적 시도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타진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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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국학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이며, 계간 『창작과비평』 주간으로 있다. 현대중국학회와 중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계간 『香港中國近代史學報』 『台灣社會硏究』 등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 『중국현대대학문화연구』 『동아시아의 귀환』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공편) 『대만을 보는 눈』(공편)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思想東亞: 韓半島視角的歷史與實踐』, 역서로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공역)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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