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여자, 재물, 옛일들은 앙투안이 세상과 절연하고 사막으로 들어가면서 버린 것들이다. 아니, 버렸으나 버리지 못한 것들이다. 그것들이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보는 헛것들은 그의 내면에 억압되어 있는 온갖 욕망의 형태들이다. 그는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리고 세상을 떠나 홀로 수행에 힘쓰고 있지만 사막에서의 한결같은 나날은 오히려 그의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앙투안의 욕망은 또한 플로베르의 그것이기도 하다. 플로베르는 병으로 인해 모든 욕망을 포기하고 시골로 들어가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재기 넘치는 청년에게 이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브뤼헐의 그림에서 성자를 괴롭히는 이상야릇한 괴물들을 보았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 버린 자신의 욕망의 모습을 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토록 강렬하게, 그토록 오랫동안 성자의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성 앙투안의 유혹≫은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기독교의 성자전에 따르면 앙투안은 잠시 흔들렸으나 결국 유혹을 극복한다. 하지만 플로베르의 성자는 이와 다르다. 플로베르의 앙투안은 육체적·물질적인 유혹은 물리치지만 다른 것, 특히 지식의 유혹에는 몇 번이나 굴복한다. 그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이는 신과의 합일이나 구원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6장에서처럼 악마의 등에 올라 하늘을 날 때다. 그는 무한한 공간을 날며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우주의 장관을 보고 감격한다. 또한 7장에서처럼 생명체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일부임을 깨닫고 열광한다. 마지막에 물질과 하나가 되고 싶다고 외치는 앙투안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모든 것이 되고 싶어 했던 작가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이집트 사막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는 성자 앙투안은 바로 크루아세에 칩거한 채 오로지 문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플로베르다.
≪성 앙투안의 유혹≫은 앙투안의 독백, 등장인물들과의 대화 혹은 그들의 대사, 방백과 지문 등으로 구성되어 언뜻 희곡처럼 보인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플로베르는 극으로 쓸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곡으로 보기에는 모호한 점들이 있고, 작가 또한 상연을 목적으로 글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환상극 형식을 취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를 비롯해 기독교 여명기의 여러 이단, 고대의 종교들, 과거의 우상들이 성자의 유혹자로 등장하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플로베르는 엄청난 독서를 했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가 읽은 수많은 책과 자료가 소설 속으로 녹아 들어가 있어 이 작품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게다가 앙투안 자신도 꿈인지 생시인지 잘 분간하지 못할 만큼 현실과 환상이 경계 없이 뒤섞여 읽기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상상력의 가면무도회”라고 할 만큼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플로베르를 사실주의 작가라고 규정하기 어렵게 된다.
플로베르는 친구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성 앙투안의 유혹≫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856년에 한 번 개작했고, 그리고 다시 한 번 고쳐 쓴 것을 1874년 출판했다. 최초의 구상에서 30년이 흘렀으니 가히 “필생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