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프리츠의 집에서 이들 네 사람은 촛불을 켜고, 피아노 음악이 나지막이 들리는 가운데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정감 있는 저녁 시간을 보낸다. 테오도어는 낙천적인 미치와 부담 없는 연애 관계를 펼치는 반면, 유약한 성격의 프리츠는 상류사회의 한 유부녀와 복잡 미묘한 비극적 사랑에 빠져 있다. 테오도어는 프리츠가 이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크리스티네 바이링과 구속력 없는 사랑의 유희를 제안한다. “기분 전환! 그게 바로 심오한 의미라네. 그 여자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래서 소위 흥미로운 여자들이 내게 거슬리는 거지. 여자들은 흥미로울 게 아니라 편안해야 하네”라고 테오도어는 프리츠를 설득한다.
〈사랑의 유희〉는 이 작품이 쓰인 19세기 말에 이미 역사물이 되어 버린 독일 시민비극의 후예로 간주할 수 있다.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 실러의 〈간계와 사랑〉 같은 예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계몽주의적 시민비극의 경우 시민계급의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신분 문제 혹은 상대방의 인간성 결여로 사랑에 좌절해 파멸한다. 계몽주의 시민비극은 여성의 육체적 몰락을 사회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의 유토피아로 승화시켜 계몽주의라는 규범적이고 교육적 차원을 보여 준다. 반면 슈니츨러에 이르러 계몽주의적 인간성의 승화는 인간의 숙명론에 패배하고 만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의 초기 자연주의 드라마 〈해 뜨기 전〉과 〈들쥐 떼〉에서처럼 〈사랑의 유희〉 마지막 부분에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절망감이 두드러진다.
이 드라마를 특히 돋보이게 하는 것은 생략 기법이다. 특히 대사를 통한 혹은 지문에 나타나는 심리적 암시나 묘사의 탁월함은 슈니츨러의 다른 모든 작품들에서와 같이 이 드라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알레빈(R. Alewyn)은 슈니츨러의 문학 세계와 작가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영혼의 분석자이자 풍속 묘사가, 사회 비판자이자 진리의 광신자”라고 표현했다. 이 드라마 고유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감수성이 풍부한 빈 대중극의 유형을 사회 심리 드라마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