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지고 인간의 도리마저 잃어버린 세상에서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1636년 12월, 한겨울 위태로운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그토록 척화를 외쳤을까? 청군이 포탄을 퍼부으면 성벽은 곧 무너질 것이고, 포탄을 퍼붓지 않으면 성안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을 것이었다. 어느 한 곳에서도 근왕병의 봉화가 피어오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조는 1637년 정월 초하루에 백관을 거느리고 북경에 있는 명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대체 무엇이 그들이 군신의 예를 다하도록 이끌었을까? 그리고 그해 1월 30일, 마침내 임금은 삼전도로 나아가 오랑캐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중원의 황제는 오랑캐에게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적이 천하를 유린하여 인과 의가 끊어지고 충과 효가 무너진 세상에서 이제 조선은 어떤 나라이며,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어야 했나?
『아버지의 그림자』는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이라는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조선의 국가정체성은, 곧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던 양반 엘리트 지배층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분석하고, 그런 정체성이 당대의 양반 지배 구조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여러 측면에서 밝힌다. 또한 오랑캐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 항복의 후유증이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뿌리째 흔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한중 두 나라의 다양한 사료를 교차 검토했고, 그 속에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조작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 밖에도 1620년대에 임금과 신하가 목숨을 걸고 맞부딪친 주화 대 척화 이념 논쟁부터 1690년대에 온 나라가 국운을 걸고 뛰어든 의리 현창 사업까지, 책 속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살아남아야 했던 ‘새로운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University of Washington, Seattle University, UCLA에서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를 가르쳤다. 주로 조선시대 양반 지식인들의 중국관과 유교의 한국적 특성이 결합되어 조선사회를 만들어 간 과정과 그 역사적 유산이 현대 한국사회에 전이되어 나타나는 양태에 관심이 많다.
지은 책으로 《중종의 시대: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