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의 전개과정과 결말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들은 지상에서의 가치들에 함몰되지 않고 영원한 도성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간다. 그러나 지상의 도성은 지상에 매여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것이 영원한 듯 착각하면서 탐욕과 만용으로 전쟁을 일삼고 심지어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두 두성의 차이는 종말에 드러난다.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한 진리 안에서 완성될 것이지만, 지상의 도성은 종말의 때에 분명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요점이다.
기나긴 논의 끝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달한 것은 기독교에게 로마에 앙갚음하라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삶의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로마인을 포함한, 혹은 로마 시민사회에 섞여 사는 모두가 참된 종교(vera religione)를 찾고 진정한 윤리적 성숙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문화권에 속한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유럽 문화의 정수를 향유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354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Thagaste)에서 태어났다. 타가스테는 지금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지중해를 끼고 로마를 가까이 할 수 있는 문화적 조건을 지녔다. 기초적인 초등교육 이후 고향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마다우라에서 365년부터 369년까지 공부했던 시절,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이었던 듯싶다.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를 잠시 쉰 것은 369년경이다. 그리고 371년경 카르타고에 유학하여 수사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 어떤 여자와 동거 생활을 했고 372년경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았다. 그리고 마니교에 심취했다.
375년 고향에 돌아와 수사학을 가르쳤고, 이듬해 카르타고에 가서 수사학 교수로 활동했다. 로마에 간 것은 383년경이다.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 로마에서 그는 수사학 교수로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로마 시의 공식 파견을 받아 밀라노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이때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만난다. 점차 마니교에 흥미를 잃었고 그들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386년 밀라노의 정원에서 그는 결정적인 회심을 체험하고 기독교 신앙인으로 전향한다. 이후 밀라노 북쪽의 카시키아쿰(Cassiciacum)에 머물면서 세례 받을 준비와 함께 경건 생활을 한 후, 밀라노에 돌아와 아들 아데오다투스, 동료이자 후배인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 생활을 하고 싶어 로마 남쪽의 오스티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387년 어머니 모니카를 여읜다. 로마에 몇 달간 머물며 집필 활동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원을 세운다. 그때가 388년경이다.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이때 죽었다.
그가 서양의 스승으로서 진면목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391년 히포 교구에서 성직자로 세움을 받은 어간부터일 것이다. 특히 395년 히포의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를 위해 헌신한 덕에 그는 거장으로 기억된다. ≪고백록≫을 쓴 것은 397년부터 400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후 배교했던 성직자 문제를 두고 폭력 사태로 비화된 도나티스트 분파주의자들과의 대립에서 교회의 일치를 위해 지도력을 발휘했고, 자유의지와 은총에 관한 펠라기우스와의 신학적 논쟁에서 은총의 중요성을 확립하는 등 왕성하게 집필하며 열정적으로 목회했다. 이 무렵 저술한 불후의 명저 ≪신국론≫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생의 변화, 성직자로서의 삶의 정황, 그리고 로마의 사회상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서기 410년,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로마가 함락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너져 내리는 로마를 바라보면서, 시간이 지나면 흘러가고 쇠망할 한시적인 가치들을 넘어 영원불변하는 참 진리의 소중함을 글로 남겨, 후세를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