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화두는 바로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는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탐구되는 철학적·인문학적 명제다. 여러 성자들은 고행·수행이나 명상으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고, 많은 사상가나 문학가들 또한 나름대로의 명상과 관찰과 기록으로 인간을 탐구해 왔다. 그런데 생텍쥐페리는 교통수단인 비행기를 성찰의 도구로 혹은 명상의 거소로 변용한 점이 특별하다.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에서는 조종사가 입는 비행복에다 여러 부속품을 붙여 놓고 거기에 연결된 산소통의 배선이나, 모든 장치의 배선 등을 마치 어머니의 배와 연결된 탯줄로 비유하면서, “비행기는 나를 양육한다. 이륙하기 전에 비인간적이던 비행기가 지금은 나에게 양분을 먹이고 있으니 나는 이른바 자식으로서 애정을 느낀다”고 묘사한다.
여기서 파일럿 파비앵이 위험을 수반하는 야간에 비행기를 조종하면서도, “명상을 시작했다”고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비행기를 조종하면서 생텍쥐페리는 하늘과 땅, 별과 달, 폭풍우와 마주하며 우주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비행기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이 두 개의 우주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실토하던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에서는 더 직설적으로 토로한다.
“우리는 우주적인 척도로서 인간을 판단하며, 마치 연구 기재를 통해 들여다보듯이 비행기 창을 통해 인간을 관찰한다.”
이 우주적인 명상이란 비행 중에 마주치는 죽음의 경계에서 불현듯 깨닫게 되는 인간 성찰이다. 여기서도 작가는 항공사 지배인 리비에르를 통해서 뇌우 속에서도 싸울 수 있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위대함이 잠재된 인간성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 바로 그 허물들은 마치 현기증처럼 그 사람을 엄습하기 마련이니, 불행이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내부에서 찾아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빗발치는 적군의 포탄 속에서 전투기를 조종하면서도 계속되는 작가의 인간 탐구는 ≪전시 조종사≫에서 죽음의 성찰로 이어진다. “죽음이란 세상을 새롭게 다시 배열한다”, “육체가 무너질 순간에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일련의 사유는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여, 생과 사를 초월한 인간의 영원의 세계를 지향한다.
앙투안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Roger de Saint-Exup?ry)는 1900년 6월 29일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사는 곳 인근의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처음 타 본다. 21세에 군에 입대, 스트라스부르 공군기지에서 근무하던 중 군사비행 조종사 면허를 취득한다. 23세에 첫 비행 사고로 예비역 중위로 제대하고, 자동차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하지만 영업 수완이 없자 글쓰기에 전념한다. 25세에 ≪은선≫지 편집장인 장 프레보와, 앙드레 지드를 만나면서 생텍쥐페리의 문학 인생이 시작된다. 26세에 ≪은선≫지 4월호에 ≪남방 우편기≫의 초고가 되는 단편소설 <비행사>를 발표한다.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정비사로 채용되면서, 툴루즈 항로 개척 책임자인 디디에 도라와 함께 정기 항공로 개발에 참여한다.
29세에 ≪남방 우편기≫를 출간하고, 남미 항공로 개척을 위해 아르헨티나 우편 항공사의 지배인이 된다. 30세에 민간항공 봉사 공로로 국가에서 주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39세 나이에 공군 대위로 참전, 알제리 2/33정찰비행대에 합류한다. 40세 때 아라스 상공에서 정찰비행을 하던 중 비행기가 피격되고,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으로 7월 31일에 제대한다. 비시 정부에서 제안한 관료직을 거절하고, 뉴욕으로 건너간다. 42세 때 ≪전시 조종사≫가 ≪아라스 비행(Flight to Arras)≫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고 나서 파리에서 출판되지만 독일 점령 당국에 의해 판매 금지된다.
1943년 5월에 연령 제한에 굴하지 않고 알제리 우지다 기지에서 미군 사령관 휘하 2/33정찰비행대에 복귀하고, 정찰비행 중 사고를 두 번 당한 후 예비역에 편입됐다. 1944년, 44세라는 나이에도 상관없이 다시 복직을 간청하여 5회 이상 비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33비행대에 복직하였으나 6∼7월 사이에 프랑스 상공 정찰비행을 8회나 나간다. 7월 31일에 마지막으로 허락을 받고 그르노블?이네시 간 정찰비행 임무 수행을 위해 오전 8시 30분 코르시카섬의 보르고 기지를 이륙하지만, 그 후 행방불명됐다. 사망증명서에는 ‘1945년 9월의 법원 판결에 따라 프랑스를 위해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다. 1950년에 프랑스는 생텍쥐페리에게 1939∼1945년 전쟁의 십자무공훈장을 추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