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야”
인간의 고독과 마음의 통증을 끌어안는 섬세한 감각
13년 만에 다시 선보이는, ‘은희경’이라는 강력한 아름다움
*창비에서는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소설 중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새로이 단장한 ‘리마스터판’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잡은 작품들이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95년 등단하여 올해로 등단 25주년을 맞으며,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된 우리 시대의 작가 은희경. 서정적 감수성과 냉철한 관찰력을 결합한 유머러스한 필치로 현대인의 삶을 예리하게 묘파한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가 13년 만에 ‘리마스터판’으로 돌아왔다. 이번 리마스터판은 기존 실린 중단편 6편을 작가가 직접 새롭게 수정하고 작품 순서도 다시 배치함으로써 수록된 모든 작품의 개성과 색깔이 더욱 뚜렷해지고, 조용한 연민과 공감의 시선, 특유의 경쾌한 문체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 현대의 고독하고도 분열적인 인물을 다루고, 그 소소한 일상의 국면에서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은희경의 섬세한 시선과 서사가 빛을 발하는 소설집이다.
“은희경의 소설은 차라리 귀띔이고 속삭임이라서
대뜸 반응하기에 앞서 한 번쯤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섬’을 생각하게 한다.”
(제38회 동인문학상 심사평)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모든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현실과 환상의 긴장과 착종이다. 서사를 따라 충실하게 읽다보면 소설 속에서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적 현실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예술은 사람들이 사고하는 일정한 패턴을 배반함으로써 긴장을 만들어”(「의심을 찬양함」)내듯이, 하나의 허구(소설) 안에 허구적인 설정이 겹겹으로 등장한다. 바깥의 허구(소설 속의 현실)보다 더 허구적이고 황당한 상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소설 속 삶과 현실은 오롯하게 다른 차원의 삶으로 열리며 진정성을 얻는다. 겹겹의 허구 속에서 한 차원 다른 생의 진실을 만날 수 있다.
2006년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이기도 했던 표제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는 서른다섯번째 생일날,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는 뚱뚱한 모습만을 보였고, 이제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아버지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자신을 거부하는 현실에서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 음식에 대한 거부와 연결된다.
「날씨와 생활」에서는 꿈 많은 몽상소녀 B가 출생의 비밀이나 언젠가는 세상을 놀라게 할 자신을 끊임없이 상상하지만 현실은 상상과 다르고, 오히려 냉혹하기만 하다. 잔뜩 긴장한 B는 할부 책값을 받으러 온 수금원과 어머니의 담담한 모습에 주체할 수 없이 큰 웃음을 터뜨린다. 상상(혹은 환상)과 현실의 팽팽한 긴장이 풀리며 쏟아져나온 그 허탈한 웃음이야말로 은희경 문학의 진정한 페이소스이다. 끝까지 비극인 인생도, 마냥 희극인 인생도 없다는 명확한 이치를 깨달은 어린 소녀는 누구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고독의 발견」에서 거짓말도 못하고 별볼일도 없는 만년고시생 주인공 K는 생일날 찻집에서 몽환적인 노래를 들으면 잠에 빠졌고, 그뒤로 펼쳐지는 일들은 꿈속처럼 묘한 분위기이다. 한 사내가 나타나 W시의 여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W시에서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자신을 여러개로 쪼갤 수 있다고 말하며 나를 스스럼없이 대한다. 모두 꿈속 상황이고 인물이다. 다시 꿈에서 깬 K는 제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고독을 발견하고 소리 없이 오열한다.
「의심을 찬양함」에서는 현실의 우연과 필연의 통계학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주인공 유진은 친구 S의 결혼식에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자신이 서점에서 산 책과 똑같은 책을 들고 탄 남자와 동석을 하게 되고, 오피스텔 밀집 지역에서 살던 당시의 일을 떠올린다. 유진은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와, 잘못 배달된 사과상자의 주인이라며 찾아온 오피스텔 옆동 남자를 동일인으로 생각하고 만날 약속을 하지만, 정작 약속장소에 나타난 것은 그 남자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자신의 형이 고의적으로 유진에게 접근했다며 세상에 운명이나 우연은 애초에 없고 과학과 인과관계의 법칙에 의해서만 지배될 뿐이라고 유진에게 강변한다.
은희경은 13년 만에 다시 선보이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도 여전히 문장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 수사적 긴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번 리마스터판을 위해 역시 다시 손질한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로 말하자면, 질문과 고민이 응축되어 있는 이야기인 채로 아름답고 낯설고 (섣부른 전망을 거절한다는 의미에서) 끝내 허망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며, “이제 은희경은 하나의 장르가 된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독특한 서사와 인물을 통해 범상치 않은 일상과 현실의 단면을 극적으로 클로즈업함으로써 냉소와 위악 대신, 조용하고 나직한 공감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여전히 그 무엇보다 힘이 세고, 그래서 아름답다. 이번 리마스터판은 은희경의 독보적인 가치를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확신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책 속에서
나는 그를 한번 노려본 뒤 그대로 뚜벅뚜벅 영정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이태리 식당에서 지금까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보았듯이 아버지 역시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아들을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뚱뚱한 아이의 기억을 갖고 떠나버렸다. 비너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55면)
“온몸이 묶인 채 검은 물에 실려서 어딘지 모를 어둠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 이런 게 사람의 인생이 아닐까.” 이것은 B가 책에서 베낀 구절이다. 그러나 거대한 흐름에 실려 어딘가로 떠내려가지만 B는 한번쯤, 자기를 실은 배에서 벌떡 일어나 작고 하얀 손을 높이 쳐들어서, 마치 춤을 추듯 유쾌하게 흔들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날씨와 생활」 90면)
“선배가 생각하는 진화란 게 뭐예요?”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인간들은 다르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사는 곳도 다르고 먹이도 다르고 천적도 다르고, 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야.” (「지도 중독」 144면)
내 입에서 시가 흘러나올 때마다 내 가슴은 자꾸만 아파온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눈물이 발밑으로 떨어지며 사랑의 종말을 애도한다. 술에 취해 오줌을 누러 나온 친구들의 입김으로 골목 안은 눅눅하다. 티셔츠에 어지럽게 그려져 있던 높은음자리표가 비틀거리며 끊임없이 허공으로 올라간다. (…) 1992년 봄밤, 우리의 귀한지점 리버 쎄느에서 쓴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233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객관적 정보가 아니에요.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느낌이라구요. 인간이 오피스텔 밀집지역의 폐쇄회로 데이터 따위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골방에 틀어박혀 인터넷으로 세상 모두를 검색할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서 삶에 대한 실감은 결코 얻지 못해요. 나는 내가 만나러 온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의심을 찬양함」 2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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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殷熙耕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상속』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중국식 룰렛』,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이너리그』 『그것은 꿈이었을까』 『비밀과 거짓말』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태연한 인생』 『소년을 위로해줘』 『빛의 과거』가 있다. 문학동네소설상,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