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와 폭력이 일상화된 공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녀들의 삶을 개성있는 시어로 다룬 첫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으로 노동시의 새로운 실험을 보여주었다는 평과 함께 주목받은 이기인 시인의 신작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가 출간됐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전작과는 사뭇 다르게 서정적인 시세계가 두드러지는데, 소외된 이들을 향하는 낮은 눈길로 고통과 희망을 오가는 삶의 장면 장면들을 정제된 시어로 포착해내 슬프고도 가슴 찡한 울림을 선사한다.
이기인 시의 모태인 ‘소녀’들은 이번 시집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적 착취와 성적 억압을 감내하며 외로움과 절망으로 신음하는 소녀들은 힘든 삶을 살아가는 한 개인인 동시에 이 땅의 모든 약자들을 대변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집의 가장자리와 가장자리를 묶어놓은 빨랫줄을 따라서 소녀의 젖은 팬티가 흔들흔들 논다 / 녹슨 못으로 붉어진 벽까지 물방울 하나가 쭉 흘러가서 꽈당, 부딪친다 // 이 희미한 멍은 어디서 얻었니 언니야 / 눈부신 오후의 햇살은 젖은 바닥에서 올라와 소녀의 치마 속 무릎을 보고 그 위로 훤히 통과한다(「푸른 멍의 소장자」 부분)
열악한 노동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받는 이 땅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시인에 의해 주체의 자리를 획득한다. 작업장에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보잘것없는 이들이지만 이들 역시 엄연히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감성을 지닌 존재임을 시인은 환기시키는 것이다.
조용히 닳아 없어진 삶의 유혹 때문에 청소부는 매월 삼십만원을 받으며 / 책상 위에서 시들어가는 장미의 불안을 본다 / 매일매일 닦아주는 실내에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실내화의 슬픔에 발목을 넣는다 / (…) / 몸을 숙여서 끌고 가는 실내화의 아픈 발끝으로 그의 새벽 미열이 내려와서 뜨겁다(「실내화」 부분)
이곳에 발딛고 삶을 꾸려가는 이들이 어찌 이들만이겠는가. 시인은 이내 시선을 더욱 낮고 너르게 가져간다. 가난과 외로움으로 침묵하는 외국인 노동자나 노숙자, 누구도 돌보지 않는 독거노인과 버려진 아이들 또한 그가 그리는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파도를 넘어온 몸이 돌처럼 앉아 있다 / 그 까만 몸이 초록색 때수건을 손바닥에 끼고 가슴을 문지른다 / 국적을 알 수 없는 슬픔이 찔끔거리다 쏴아아, 샤워기 꼭지에서 흘러나온다 / 비참하게 긁어놓은 근육을 그는 한 바가지 찬물로 깨우고 싶다(「때수건」 부분)
이렇듯 이기인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존재들이다. 고달픈 삶을 하루하루 꾸려나가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일상은 슬픔과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눈여겨볼 부분은 그럼에도 시인은 이러한 슬픔들을 눅눅함 없이 담담하게 그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거창한 담론을 부르짖거나 현실의 심연을 파헤치려는 격정 없이 삶의 한 장면을 세심하게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그의 시가 대체로 차분한 정적 속에 읽히는 것 또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돌다리지점 은행 쪽으로 녹슨 유모차 바퀴소리가 덜덜덜 주저앉는다 / 기다란 대출상담 번호표를 뽑은 손이 돌다리 난간을 놓치고 / 물살 아래로 아래로 퐁당 떨어지고 싶다 / ‘그러나 살아야지’ 출렁출렁한 햇빛이 어깨를 툭 치며 이웃처럼 웃는다 / 붓꽃무늬 치마와 유모차 바퀴가 길의 틈바구니에 낀 민들레처럼 앉아 있다(「돌다리」 부분)
단순히 소외된 이들을 소재로 삼는다는 차원을 넘어 이기인의 시가 한층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것이 어딘가에 있을 그 누군가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신’과의 소통을 매개하는 진심어린 고백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의 출발점이 ‘당신’이며, 시를 읽는 이도, 심지어 시를 쓰게 해주는 사람도 결국 ‘당신’임을 숨기지 않는다.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지요 / 나는 당신의 등뼈를 본 첫번째 사랑이지요 / 당신의 등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는 사랑이지요 / 그렇게 얇은 삶이 바람에 견딘 것을 알고 / 손가락으로 당신의 등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과 / 뒤돌아서서 날 깨우쳐주신 마른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 (…) / 당신은 그때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몸으로 들어왔지요 /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 / 불빛처럼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를 밤새 읽다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부분)
이 힘겨운 시대에 버팀목이 되어주는 ‘당신’이야말로 시인의 시를, 그리고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끊임없이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과 함께 써내려가는 것이다. 삶에 지친 누군가의 “어깨”에 따스하게 전해지는 “편지”가 바로 이기인 시의 지향점일지도 모른다.
균형을 잃어버린 내가 당신의 어깨를 본다 / 내일은 소리없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 나는 초조를 잃어버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더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 첫눈이 쌓여서 가는 길이 환하고 넓어질 것 같다 / 소처럼 미안하게 걸어다니는 일이 이어지지만 끝까지 정든 집으로 몸을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 (…) / 요구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깨는 초라한 편지를 쓰는 불빛을 걱정하다가 / 아득한 절벽에 놓인 방의 열쇠를 나에게 주었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부분)
그리하여 시인의 시는 슬픔과 고난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때로는 죽음을 말하고, 때로는 피와 눈물을 노래하지만 거기에 그치기엔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시인을 포함하여)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위한 싸움이 너무도 꿋꿋하기 때문이다.
울타리가 없는 석재상 마당은 절이었다가 교회였다가 아프리카 들녘이었다가 수줍은 소녀가 사는 외딴집으로 변한다 / (…) / 콜록콜록 돌 깎는 사람이 오래된 기침을 하면서 한 반의 아이들에게 오래된 천식을 가르친다 / 오래 입은 옷이 해지는 것을 가르치고 그 옷을 기워입는 것을 가르친다 / 작은 돌에서 더 조그맣게 떨어져나온 돌을 오래오래 보는 눈빛을 가르친다 / 아픈 몸을 끌고 가면서도 가끔은 되돌아보는 눈빛을 가르친다 (「돌 깎는 사람」 부분)
평론가 송종원이 “남루한 희망을 깁고 또 깁는다”(‘해설’)라고 표현한 것처럼 시인은 오늘도 시 쓰기라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낡고 해진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슬픈 현실과 힘겨운 노동을 희망이란 배음으로 노래한다. “이쪽이 저쪽을 초라하게 하지 않는 삶”을 위해 “허공에 시의 한 잎을 띄워보”(「각형큰사발」)내는 것이야말로 “추위에 떠는 당신께” 향하는 “꽃무늬 혁명”(「소녀의 꽃무늬 혁명」)의 길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여기 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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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