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 광복군에 투신한 6천 리 대장정의 기록
1944년 7월 7일, 중국 쉬저우의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가 일본군이 중일전쟁 7주년을 맞아 기념 회식을 하느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김영록.윤경빈.홍석훈과 함께 목숨 걸고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돌베개>는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고인이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이다.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7개월여에 걸쳐 쉬저우에서 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대장정에 굽이굽이 서린 숱한 일화와 1945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직후의 상황까지 2년여의 기간을 다룬 이 책의 무대는 평양에서 쉬저우→린촨→난양→라오허커우→파촉령→충칭→시안→상하이→서울 등지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함석헌 선생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이 책이 나를 빨아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회오리바람을 쳤습니다"라고 한 바 있는 이 책은 저자의 표현 그대로 자신보다 앞서 죽어간 "불쌍한 선열들 앞에 띄우는 바람의 묘비"이며, 그 내용은 망국과 분단이라는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하다.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 선천 신성중학교, 일본신학교, 한국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징집되어 중국 쉬저우에 배치되었다가 그해 7월에 탈출, 중국 대륙 6천 리 장정을 거쳐 1945년 1월 충칭 소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OSS(미국 전략첩보대) 특수훈련을 받았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11월 임시정부 제1진으로 김구 주석의 비서 겸 광복군 대위로 환국했다.
1953년 월간지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가난한 분단국가의 미래 개척에 필요한 지적・문화적 자산을 응집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펜의 힘으로 독재와 부패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 연행, 투옥되었다. 1967년에는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된 상태에서 7대 국회의원에 옥중 당선되었으며, 이후 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75년 1월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유신헌법 개정을 위해 헌신하던 중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을 죽음을 당한다. 정부는 실족추락사로 발표했으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2012년 묘지 이장 중에 두개골에서 가격 흔적이 발견되어 죽음에 대한 의문점이 다시 제기되었고, 법의학 정밀감정을 통해 사인이 실족추락사가 아닌 가격에 의한 타살임이 증명되었다. 2013년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야 국회의원 104명의 공동명의로 일명 「장준하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1962년에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했으며, 독립운동의 공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93년에 제1회 한신상, 1999년에 문화계 최고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근래 들어 뮤지컬, 학술 연구, 다큐멘터리 방송, 장정 답사 등 저자에 대한 다양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