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내용

· 창비시선 Book 329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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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사과로 만든 광활한 우주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이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자신만의 어법으로 고유한 시세계를 펼쳐온 조정인 시인이 두번째 시집 『장미의 내용』을 출간했다. 첫시집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는 신성을 지향하는 삶과 인간의 존재론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감각적이고 예리한 언어로 형상화한 시편들이 담겨 있다.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 현실과 비현실을 아우르고 넘나들며 풍요롭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빚어낸 정교한 묘사와 산뜻한 이미지가 돋보인다.





조정인은 “자신의 관성으로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을 관통하”(「숲」)는 신성의 세계를 꿈꾼다. 그가 이 시집에서 중심시어로 삼고 있는 ‘사과’ 한 알 속에는 신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무궁무진한 비의가 담겨 있다. “고물대는 우주를 물고 있”고 “지나간/시간의 질감이 역력히 남”아 있는 이 사과에는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지워질 듯 어른거”(「홍옥」)린다.




지난여름 낙뢰, 그 환한 샛길로 사과밭의 환영이 지나갔다 몽상과 예감의 거친 파도가 쓸고 간 하늘 아래, 꿈처럼 재현된 과수원에서 사과를 땄다 그 붉은 필름에 바람의 소용돌이와 구름의 정처가 인화돼 있다 지상에 흘린 에덴의 풍문을 한입 베어물었다 불온을 부추기는 균이 고요하게 번식해갔다 (「사과 따기」 부분)



에덴의 기억을 환기하는 “하느님의 붉은 혁명”을 상징하면서 “태아들의 따뜻한 머리통 같은, 지구의 뇌관 같은”(「서쪽을 불러들이다」) 이 사과의 향기가 진동하는 곳은 다름아닌 지금-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이 삶의 현장에서 시공을 초월하며 타자들과 접속하는 시인은 “종(種)의 경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고양이는 간간 상황 너머에 있다」) 실감하며 우리 삶의 현장을 “영(靈)의 통일성이 점유하는 세계”로 인식한다.




꿈은 마을과 마을을 유전한다 머리 위로 원반처럼 날아다니는 초월의 힘을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종종 샤갈의 밤하늘을 가지는 건 이상할 게 못된다 영(靈)의 통일성이 점유하는 세계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그의 양탄자를 타고 밤하늘을 날겠는가 (「성체」 부분)



신성이 이룩한 이 세계에서 시인은 “불현듯 눈이 멀어 전신이 눈이 되는, 신성의 얼굴과 마주한 백열상태”(「숲」)를 경험한다. 그래서 그는 “영혼의 어떤 거리는 여전히 비어 있”(「날개에 바치다」)고 “신의 꿈속”(「초신성」)일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심장이 사라”진 “흰 늑대가 되어 하늘 복판을 펄럭”(「장미의 내용」)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자 한다.




나는 숨쉬는 진흙덩이, 욕망이라는 사과 한 개, 필연을 품고 날아가는 화살촉, 죽은 자들이 필자인 기나긴 연재, 태어나지 못한 메아리들의 무덤, 탄흔으로 얼룩진 성전 내벽에 걸린 인류의 파편, 한 뭉치 열패감 그리고 구토, 그 모든 무질서의 총계(「장미와 바람은 다 어떻게 보존되나」 부분)



이제 시인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자신의 실체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신성을 지향하는 여성성을 앞세워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김수이 「해설」). 중세의 시민광장에서 화형당하는 마녀(「불꽃에 관한 한 인상」), “사람들 사이 개펄에 던져져 실종된 밧줄 같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장애인들(「느리게 흐르는 책」), “지구의 어느 곤고한 시절/참 비정한 세월에게서 버림받아 굶어죽은” 혼령들(「눈보라는 어디에 잠드나」), 천년 전 나라에 전란이 있던 해 바위섬에 깃들어 살던 부부(「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납치한 무장혁명군의 간부와 사랑에 빠져 정글에서 아이를 낳은 꼴롬비아의 여성 변호사(「한 장 모포」) 등, 시공간을 넘나들며 무수한 타자들의 삶을 윤회한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독거, 아니었다(「문신」 부분)



조정인의 시는 한 편 한 편 정성이 깃들어 있다. 머리나 가슴에 기대기보다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끊임없이 자신의 시세계를 확장해나가는 진정성과 “어둠속에서 빛을 찾아내는”(조창환, 추천사) 경건한 시정신이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죽음의 내용들이 발끝을 들고 장미를 건너간다 일테면, 골목에서 사라진/영아(嬰兒)와 참새와 비둘기와 새끼고양이와 늙은 개……/가볍고 아름다운 그것들은 홀연히 몸을 띄워 대기권 바깥/제 투명한 묘지를 찾아들었다 좀 있으면 흙의 일이 궁금해진/첫눈이 오고 아이들은 눈이다! 외칠 테지/사슴이다, 하는 것처럼//(…)//돌연 천공을 찢고 내려와, 폭설에 푹푹 발이 빠지며 내 하얀 늑대가 다가오던/기척, 귓가에 붐비던 숨, 더운 혀에 관한 기억들이여 안녕/시절이여 안녕(「장미의 내용」 부분)






꽃보다 용감한 ‘언니’들이 온다



공선옥만이 쓸 수 있는 신선한 입담과 뭉클한 감동



소설은 재개발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젊은 부부 영희와 철수가 살 곳을 찾아 시골 마을에 흘러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복사꽃 환한 빛에 반해 빈집에 우연히 들어선 영희와 철수는 꽃이 좋으면 그냥 살라며 집세도 받지 않고 낯선 이에게 선뜻 집을 빌려주는 집주인의 선의가 꿈만 같다.




“…꼭 우리집에서 살고 싶어요?”


전화로 듣기에도 목소리가 선해서 우선 마음이 놓인다.


“예, 꽃은 예쁜데 집이 외로워 보인다고, 집사람이 자꾸……”


말을 해놓고 보니 아차, 실없는 소리를 했구나 하고 마음이 졸여졌다.


“꽃이라고요? 우리집에 꽃이 있었던가앙? 하여간, 언제까지 살으실지는 몰라도 꽃이 이뿌다며는, 살으야지요 뭐.”


갑자기 눈물이 나올 뻔했다. 무슨 세상에 이런 집주인이 있나.


“집세는……”


“세는 무슨. 그쪽에서 세를 받으시야지.”


“저희가요?”


“집 지켜주잖애요.” (19-20면)




그렇게 간신히 다시 한번 희망을 품고 시작한 시골생활이지만 이번에도 일이 이들의 뜻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근처에 불법 쇄석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순식간에 쇄석기 먼지와 소음으로 뒤덮인 것. 마을 사람들은 공장과 군청에 항의해보지만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마을에 얼마 남지 않은 젊은이들은 돈을 받고 공장과 협상하겠다며 등을 돌리고, 노인들만이 남아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눈앞에 닥친 생계 걱정과 현실적인 고민들로 동참하기를 주저하던 영희는 그러나 그저 “조용히 살다 죽고 싶”(68면)다는 할머니들의 지극히 소박한 바람이 무시당하는 세상에 분노를 느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분노가 거세어질수록, 마음 한편으로는 분노보다 깊은 할머니들에 대한 애정이 샘솟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꽃 같은 시절』은 근래 보기 드물게, 지금 이 순간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한 지점을 정면돌파한 작품이다. 우리사회 약자들의 편에 서서 다양한 사회문제들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온 공선옥은 이번 작품에서도 성실한 취재와 올곧은 고집으로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투쟁 현장을 거침없이 써내려간다. 하지만 이번 소설이 정말 다른 것은 ‘취재’라기보다 ‘생활’에 가까운 작품과 작가 본인의 밀착에 있다. 군데군데 코끝을 시큰하게 만드는 애틋한 문장들을 굽이돌아 결말에서 맞닥뜨리는 가슴 찡한 감동은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냈기에, 살아버렸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칫 소설의 완결성을 해칠 수도 있는 이러한 전략이 공선옥 소설에서만큼은 오히려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언니, 그게 그러니까 말야, 무엇을 반대한다고 하는 싸움이 유정면에만 있는 게 아냐. 전국이 다 그래, 다. 내 말은 그러니까, 유정면 주민들의 투쟁이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란 거지.”


“그래, 그렇다고 쳐. 그러면, 특별하지 않으면 기사로 쓸 가치도 세상에 알릴 이유도 없다는 거야, 뭐야?”


“요는, 그러니까, 그런 시시콜콜한 동네 이야기까지 기삿거리로 다루기엔 대한민국이 그리 한가한 나라가 아니란 말이지. 물불 안 가리잖아? 불만 해도 봐봐. 남대문에서, 이천에서, 광화문에서, 용산에서. 물은 또 어디야? 당장에 사대강이 있네. 언니, 근데, 사대강 중에 섬진강도 들어가나?”


“섬진강은…… 아닌 것 같애.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인가?”


“있는 곳이 남쪽이라면 영산강 쪽이야? 섬진강 쪽이야?”


“아무 쪽도 아냐.”


“으음, 그럼 뭐 시끄러울 일도 없겠네.” (92면)




한편 이 작품의 섬세함은,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무분별한 개발논리를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목소리에 밀려 더 힘없는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 물음은 아무리 작고 하찮은 싸움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일깨운다. 작가의 이러한 약자에 대한 사려깊은 감수성은 작품 속 ‘지렁이 울음소리’의 이미지로 환기된다. 이 소설에는 작중인물들이,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귀뚜라미 소리나 다름없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는 장면이 되풀이해서 등장한다. 이것은 그들이 힘있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작은 소리의 귀함을 안다는 증거이며 작가 자신이 세계관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울면 지렁이 울음소리가 묻힐까봐 걱정하는 대목은 작고 보잘것없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그들의 마음이야말로 실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것에 닿아 있는지를 증명한다. 남성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지렁이 울음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설정도 퍽 흥미롭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지렁이 울음소리가 띠루띠루띠루루루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돌공장에서도 다갈다갈다갈 쿵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자 하니, 지렁이는 돌공장 소리에 결코 지지 않겠다는 듯, 간절하게, 줄기차게 울 태세였다. 철수가 그런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산을 내려간 것이 안타까웠으나 할 수 없었다. 가만히 귀기울여야 들리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철수의 귀에는 오직 돌공장 소리만 들릴 거였다. 이 세상에는 돌공장 소리 말고도 지렁이 울음소리도 있다는 것을, 철수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며 영희는 감자밭에 몸을 엎드리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108면)



우리는 적막한 속에서 소리 없는 것들의 온갖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없다고 해서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닌 것들의 소리다. 그래서 가슴 한쪽이 먹먹해왔다. 꼭 우리들 같아서. 우리도 소리를 안 내고 살 뿐이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세상은 땅 파먹고 사는 아낙들은 소리가 아예 없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무슨 소리라도 낼라치면 무식한 아낙네가 뭣을 아느냐는 투였다. 그래도 우리는 울지 않았다. 우리 울음 알아주는 데도 아닌 데서 울면 우리만 설워지니 울지 않았다. 어쩌다 울 때도 놀 때나 울지, 일할 때는 힘이 들어 울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울면, 닝꽁닝꽁닝꽁, 지꾸지꾸지지잉, 띠룽띠룽띠루룽, 하는 것들이 우리 울음에 묻힐까봐 울지 않았다. (79-80면)



활달한 서사와 해학. 세대와 혈연을 초월한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



천연한 이야기 솜씨로 독자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온 공선옥은 이번 작품에서 더욱 자유로워진 화법과 한결 풍부해진 해학을 선보인다. 계산된 플롯을 과시하기보다는 물처럼 유연하고 풀처럼 온순한 흐름으로 ‘이야기’의 본령을 충실히 따른다. 이승과 저승, 세대와 혈연 등 각종 경계를 부지런히 넘나들며 한바탕 분방한 상상력을 펼친 작가는 아흔 할머니가 ‘언니’가 되고, 베트남 며느리가 읊어준 시가 마음을 울리는 장면 등을 통해 세대와 혈연, 국가를 초월한 연대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또한 오랜 세월 골몰해온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탐구도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영희의 혼을 혼엄마들이 위로하는 마지막 장에서는 생과 사를 뛰어넘는 거대한 자연의 비밀마저 엿보이는 것이다.



문학과 현실이 창조적으로 만나는 수작



이렇듯 공선옥은 그간 쌓아온 작가로서의 공력을 그러모아 정치적이면서도 순하고, 유쾌하면서도 눈물겨운 수작을 완성했다. 아흔살 ‘언니’들의 소풍 같은 첫 데모를 담은 이 작품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 꽃 같은 싸움이 있다고 속삭인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전라남도 어느 시골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 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패배로 끝난 이 작품의 결말은 결코 절망이나 허무함으로 남지 않고, 오히려 독자들에게 새로운 행동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순하고 약한 사람들의 순하고 약한 ‘항거’”(260면)가 쉽게 시들지 않도록 독자들의 지지를 구하는 작가의 간곡한 목소리는 문학의 윤리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문학과 현실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환기시킨다. 이 글은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존엄한 질문으로 이제 당신에게 그 답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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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과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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