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최정진 시인의 첫시집 『동경』이 출간되었다. 80년대생 신세대 시인으로서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인은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이른바 ‘미래파’와는 또다른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밀도 높은 언어와 다채로운 이미지가 넘쳐나는 매혹적인 시편들이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며, 시적 언어에 대한 첨예한 자의식이 깃든 서정적 언어 속에 내장된 전복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최정진의 시의 시적 자아는 ‘너’라는 존재와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아이다. 대상을 장악하는 ‘감각’보다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동요하는 ‘감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시는, 말하자면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는 ‘나’와 ‘너’의 소통의 순간을 찾고자 하는 여정에 다름아니다.
발을 만지는 게 싫으면/그때 말하지 그랬어/외로워서 얼굴이 굳어가잖아/너의 집 앞에 다 왔어/창문을 열어봐/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참을 만큼 의자를 참았다는 듯이(「첫 발의 강요」 전문)
문득, 뒤늦게 ‘너’의 마음을 깨달은 순간, 화자는 너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가본 적 없는 곳”(「로션의 테두리」)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그런데 “너의 집 앞에 다 왔”을 때, 별안간 “다리가 풀리기 시작”하고, 너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믿었던 어떤 확신이 주저앉는다. 소통의 문이 열리지 않는 단절의 순간, 자신을 지탱해오던 확신마저 사라진 순간, 화자는 이제 타자를 향해 ‘반쯤 열린 주체’(장은정, 해설)가 된다. 그리고 그 열린 틈으로 빛과 어둠, 불안과 혼란이 들이친다.
나는 너의 어디에 닿은 걸까 버스가 급정거한 순간 소리 위로 정교하게 쓰러질 듯//너를 밀어버렸지만 쓰러진 건 너와 내가 아니었다 당겨지는 귀를 내 팔이 붙들고 있었다 내 팔은 방아쇠를 당겼는지도 모른다 날개를 젓는 새처럼 귀가 많게 보였을지도//버스가 급정거한 순간 잠들고 싶은 집을 떠올렸는지도 너의 비명은 너의 다짐인지도 모른다 버스는 더 빠르게 지나갔는지도//버스가 멈추고 무언가 두고 온 건지 튕겨나간 건지 끌려가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네가 멀어지고 있었다(「버스의 탄성」 전문)
버스가 급정거한 순간, ‘나’는 “소리 위로 정교하게 쓰러질 듯” “너를 밀어버”린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쓰러진 건 너와 내가 아니”다. 속도와 소리와 운동의 혼란이 매혹적으로 쏟아지는 가운데, 문득 너를 잊은 채로 “두고 온 건지” 단지 “튕겨나간 건지” 아니면 억지로 “끌려가는 건지”조차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이처럼 불안정과 혼란에 빠져든 시적 화자에게 세계는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어리둥절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방들이 집을 부술 듯이 차 있다/옥상은 이상하게 비어 있어/숫자와 맞서고 있다/십자가의 조명이 횟수로 나뉘려 하면/물어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런 생각조차 느껴지지 않게/너의 입으로 너의 이름을 부르며(「숫자를 찾아가는」 전문)
방들은 “집을 부술 듯이 차 있”는데 옥상은 “이상하게 비어 있”다. 이 기묘한 대조는 반쯤 열린 주체가 경험하는 어리둥절한 세계를, 겉으로는 텅 비어 있지만 안으로는 가득 차 있는 시적 공간으로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이러한 시적 공간은 “욕조로 쏟아지는 물을 보면 계단은 중간에서 차오른다”(「내 몸 안의 반지층」), “속옷을 벗고 입는/짧고 긴 중간에 대해”(「속옷」), “어딘가를 향하지만 아이는 늘 중간에 있다”(「열차의 윤곽」) 같은 구절에서 보듯이, ‘중간’이라는 위치로 자주 형상화된다. 그것은 곧 자아와 타자 사이의 ‘틈새’를 가리키는 것이며, 최정진의 시가 자아내는 긴장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있다//내가 믿는 시와/꿈꾸는 시와/쓸 수 있는 시가 모두 달랐다//그곳은 음악이 지나치게 크다/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그들이 그곳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그곳에선 원하는 만큼 팔을 모을 수 있고/모은 팔과 모은 팔이 닿지 않는다//어떤 동작을 취해도/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무엇도 속일 수 없는 중에//장갑을 갖고/손가락의 역할들을 나눈다/그들이 그곳에 흩어져 있기를 바라고 찾는다//그곳은 너무 낮다/목소리보다 발소리가 먼저 도착한다(「동경 5」 전문)
자아와 타자 사이의 ‘틈’이란 진리로서의 시적 공간과 그 공간을 지향하는 우리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이기도 하다. 최정진의 시는 그 불일치를 통해 두 공간을 동시에 바라보는 예리한 눈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내가 믿는 시와/꿈꾸는 시와/쓸 수 있는 시”를 구분하며, “무엇도 속일 수 없는 중에” “장갑을 갖고/손가락의 역할들을 나”누고, “그들이 그곳에 흩어져 있기를 바라고 찾는다.” 여러 역할들의 여백과 불일치에 자신의 자리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도착을 거부”하면서 “문을 열다 놓고 문을 닫다 놓”(「동경 3」)는다. 그것이 최정진 시가 애써 놓치지 않는 정직한 자기인식의 자리이며, 그런만큼 그의 언어는 아련하면서도 단단한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로션을 바르다가 나는 시작된다 이것을 내 체취라고 생각하면 머릿속은 새하얘져서//네가 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소리가 쏟아지지 않게//인사를 한 만큼 얼굴은 당겨졌다가 견고하게 어디론가 베개에서 겨우 손을 놓은 냄새가 맡아지기 전에//맹세와 다른 체취를 맡아본 적이 없게//내 답은 겨우 문을 열었다 닫지만 내 불안이 가본 적 없는 곳을 지나간 곳으로 만들기 전에//도착을 거부하고 있다 용서가 잊었던 용서를 생생하게 겪게(「로션의 테두리」 전문)
Changbi Publishers
1980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순천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2007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는’ 동인으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