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洋哲學의 開祖, 플라톤의 哲學思想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구라’다. 그러니 Romeo들이여. 누군가의 첫 인상은, 되도록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Juliet들이여. 누군가의 첫 마디는, 되도록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사이 혹은 중간으로만 뒤섞이는 이념의 문턱에서, 그리고 어떤 충만(이득) 속에서, 오로지 시장 한편의 으슥한 곳으로만, 꼬여 드는 자들이 있다. 이념적인 로미오들처럼. 경제적인 줄리엣들처럼. 미국을 role model로 삼든, 부탄을 롤 모델로 삼든, 그저 그러려니 한다. 그림자권력적인 법칙에, 보다 잘 복종한다는 사실 말고는, 달리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인 탓이다. 무수한 잡종의 genre 안에서, 수도원마다의 독특한 전통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그림자권력이 엄밀히 규정해 둔 진리에 저항하는, 眞理不定者로서 살아낸다는 것은, 살아내는 동안 여러 가지 온갖 疾病的 徵候로써 고통스러워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탄식으로 살고 싶은 자에게, 미국식 삶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미국식으로 살고 싶은 자에게, 부탄식 삶은 고통스럽다. 독일식, 프랑스식, 이탈리아식…. 죄 그러하다. 동일한 상황의 持難한 반복이다. 동일한 언어의 지난한 반복이다. 그리고 오로지 고유한 법칙성만을 탐색하는 건조한 사유형식들이 있다. 그래서 일까. 되풀이할수록 어쩐지 마귀와 같은 명제들은, 절로 단단해지기만 한다.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는다고들 한다. 그러니 나는 황혼의 기타 소리를 듣는다. 아무래도 평화는, ‘전쟁적 지배’보다는, ‘계약적 복종’을 선호하는 상태다. ‘최후의 전쟁’에 의한, 노예적 정치(통치)의 종말이라고 해도 그러하다. 억압이나 압제를, 그림자권력의 대표적 속성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유치한 가설에 불과하니까. 자못 거침없는 marbling의 현혹처럼. 어떤 존재자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분석)할 수 있다고, 착각(망상)하는 자들이 있다. 인간존재를 넘어서는, 도약의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존재자로서, 스스로·저절로 춤추며 노래하는 자들이 있다. 그림자권력에 의해, 봉인되어envelopp?버린다. 거듭 함축되어impliqu?버린다. 그렇게 각인되어impress?버린다. 그런 ‘것’들에게 현실세계는, 스스로 춤추며, 저절로 노래하는 황제처럼, 각별한 의미나 가치를 결코 지닐 순 없다. Matador의 마지막 칼질에, 거대한 황소가 맥없이 나자빠진다. 흥분한 군중들은 거세게 환호한다. 군중들 틈에서, 나는 어쨌거나 스스로 非正常人(범죄자, 불순분자, 정신질환자 따위)임을 시인해야만 했다. 무슨 까닭인지, 鬪牛士보다는 황소의 편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 밤, 투우장의 황소가 되어서, 칼에 찔리는 꿈을 꾸었고, 다음날 실제로 황소가 되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해야만 했다. 막장을 향해 갈 데까지 간다. 그래서 길이 끝나는 곳, 그리고 다시 길이 시작되는 곳. 그곳으로 간다. 그러니 죽어간다는 것이야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질서ordre와 명령ordre 그 사이에나 머문다. 그렇다. 진리는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體得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시나브로 그곳이 싫어졌을까. 이미 서툰 결핍으로나 간주되는 갖은 욕망 속에서도, 나는 나일 따름인 탓이다.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 한, 단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는 탓이다. 물론 아울러 어느 순간부터, 갖은 말장난이 지겨워지기도 했다. 말장난은 아주 재미나고, 누구보다 잘 할 자신도 있지만, 참으로 허망할 따름이니까. 말장난에 길들여져서 자못 익숙해질수록, 삶은 더없이 공허해질 따름이니까. 시답잖은 인연일랑은 죄 악연이 되어버렸다. 그땐 알지 못 했다고 한들, 추레한 변명마저도 될 수 없겠지. 그래서 고립된 기호는, 삼류 호러영화의 스토리와 유사하다.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무의미와 명백히 드러나는 무의미. 직접 죽음을 경험해 보지 않아도, 이미 죽음을 아는 건, 단지 훈육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그대는, 속이 풀릴 때까지 한껏 짓뭉개다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나 쓴웃음 짓겠지. 지금껏 망상 속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이 꺼리는 이야기를 언급하는 양, 무작정 쏘다니는 바람과 구름을 굳이 분별치 않는다. 참으로 어이없게 살아내는 가련한 인간존재들에게 부여된, 가혹한 계절의 흔적처럼 고유의 감각에나 덧붙여지는 고유명사들. 고작 그림자권력의 소모품(예견된 쓰레기)에 불과함을, 어떻든지 시인하지 않으려는, 가련한 군중들의 노력이라는 허망함처럼, 모든 것을 울음으로써 해결하려는, 미신적 치료(굿판)만큼이나, 모든 것 웃음으로써 무마하려는, 심리학적 시도(웃음치료) 역시, 당최 허망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래서 여전히 착각 속에서 산다. 삶을 활짝 꽃피웠다면 幸運이다. 삶이 그저 그랬다면 多幸이다. 아무래도 여행자의 삶은, 다행스러운 행운이다. 누구나 그 길을 안다. 가장 아름다운 그 길을 안다. 가장 행복한 그 길을 안다. 가장 기쁜 그 길을 안다. 그런데 그 길은, 아름답고 행복하고 기쁜 만큼의 고통을 반드시 요구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추하고 불행하며 슬프더라도, 고통이 덜한 우회로를 택한다. 여행자의 가슴 속에는 항상 등불 하나가 있다. 그 등불을 좇으며, 한없는 여행길을 떠돈다. 아주 느린 여정이다. 그런데 아주 느린 길은, 정작 빠른 길인지 모른다. 떠나지 않고서는 결코 지금 이 순간을 발견할 수 없다. 떠나 보면 정작 소중한 것은 늘 우리의 곁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하늘, 땅, 바람, 물, 별, 불…. 행복의 파랑새처럼, 항상 우리의 가장 곁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소중한 것들이 늘 곁에 있지만, 우리는 잘 알지 못 한다. 아니 다른 것들이 소중한 줄 안다. 명품, 보석, 주식, 아파트, 자동차, 예금통장….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들은 유용한 것이지, 소중한 것은 아니다. network 속에서, 대체로 일정한 네트워크로부터 일탈한 자들은, 늘 말과 문자를 혼동한다. 아니 일부러 뒤섞는다. 그래서 불현듯 해체될 네트워크를 목적한다. 다만 언어적 사실과 언어적 본질을 자못 엄격히 분리하는 한, 언어는 결국 보편일 순 없다. 자연의 본성 안에서, 지금 이 순간 굳이 좋을 것도 굳이 나쁠 것도 없다. 자꾸 흐려져 가는 흐릿한 꿈속. 저주의 본능 안에서, 늘 흡혈의 욕망에 시달리는 vampire처럼, 시인과 철학자들 역시 환상 속에서 늘 어떤 결핍엔가 시달린다. 그렇게 잘 놀고들 있다. 잘 노는 자들은, 즐겨 노는 자들은 일삼아 욕을 먹는다. 자기보다 가진 것이 적은데도, 무심히 놀 수 있는, 그들의 놀이가 부러워서 배가 아픈 것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결코 노래하는 법을 잊어선 안 된다. 춤추는 법을 잊어선 안 된다. 消盡과 喪失의 보유Versp?tung, 혹은 연기Nachtr?glichkeit. 누군가를 잔혹하도록 욕하고 싶다면, 정작 거울을 봐야 한다. 그럴 때 거울은 가장 거울다우니까. 그럴 때 비로소 철학함은 시작되니까. 수확을 앞둔 농부의 논이, 고라니 탓에 황폐해졌다. 인간존재의 삶은, 자기가 아는 만큼의 상황 속 체험이다.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의미한 호흡(헛소리, 소문)들만 난무한다. 정작 자기 자신을, 자기의 세계에서 텅 비우지 않으며, 그저 삭제(제거)해버린다면, 이제 남겨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수확을 앞둔 농부와 고라니의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관계처럼.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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