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현지원

Jan 2011 · 에피루스

About this ebook

에피루스 베스트 로맨스 소설! “우리 그만…… 이쯤에서 끝내자.” 퇴근하자마자 서재로 쓰는 작은 방에서 한참 동안을 두문불출하던 인하는 식탁 의자의 등받이를 만지작거리며 간단명료하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찌개가 식기 전에 얼른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려던 주명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뚝배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손을 데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받침대 위에 뚝배기 그릇을 올려놓은 그녀는 재빨리 등을 돌렸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숨기기 위해 수도꼭지를 최대한 올린 그녀는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미식거리는 속을 달래 가며 인하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이느라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지만 그가 보일 반응에 고생스러운 줄도 몰랐다. 흉볼 사람도 없건만 혼자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만큼 그녀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인하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선제공격을 당한 그녀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왜 하필 오늘이어야만 할까……. 왜 하필……. 순간 주명은 어이없게도 웃음이 터지려 했다. 그동안 헤어지자는 말은 그녀의 몫이었다. 이렇게 사는 건 서로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난 절대 당신 부모님께 인정받을 수 없는 며느리니 내게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지 말라고 선언하던 쪽도 언제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이별을 고하는 건 그다. 지난 2년간, 그녀가 애증을 빙자하여 사랑을 갈구할 때마다 더욱 굳건하게 울타리를 쳐 주던 그가 말이다. 인하가 결코 허튼소리를 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명은 그의 말을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서재로 쓰고 있는 작은 방엔 이미 짐이 담긴 그의 커다란 가방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왜 이제 와서 헤어지자는 건지 물어봐도 돼?” 시끄러운 물소리에 흡수된 그녀의 목소리는 최대한 이성적이고 담담했다.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주명의 속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고 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인하는 그녀의 냉정함에 쓴웃음을 흘렸다. “내 자신에게 지쳐.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간 너한테도 지칠 것 같아.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점점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아 이쯤에서 놔줘야겠다 싶어.” 거짓말! 공허한 외침과 함께 그제야 눈물이 글썽거린다. 차가움 속에 숨겨진 네 순수한 미소가 좋아, 가식이 없는 웃음소리가 좋아서라며 육탄공격을 서슴지 않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질리고 힘들어서 놔준단다. 양심 있는 낚시꾼에게 걸린 피라미도 아니고 포로나 인질로 잡혀온 것도 아닌데 이제 네 행복 찾으라며 포기해 준단다. 가십거리를 만들며 떠들썩했던 김인하라는 남자의 잘난 사랑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사랑을 위해, 박주명이라는 보잘것없는 여자를 위해 한때 부모와 등까지 돌렸던 그가, 부모님의 돈은 한 푼도 쓰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말에 기꺼이 모든 걸 던지고 나왔던 그가, 낡은 15평짜리 서민 아파트도 마다하지 않던 그가…… 이제 그만 사랑하겠단다.

About the author

‘연인’으로 데뷔. ‘애원’으로 12회 신영사이버 문학상 우수상 수상. ‘나 그대에게’, ‘숨은 꽃’, 역사물인 ‘숙명(가제)’ 준비 중. http://www.romance-juliet.com에서 게으름뱅이 작가로 서식 중. [e-mail] ▶ 출간작 『연인』 『애수』 『비인』 『후애』 『물망초』 『재회』 『천일화』 『그의 그녀』 『청실홍실』 『애원』 『계약커플』 『계약신부』 『흔적』 『그 후』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벙어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