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살 수 없는 불모지, 시간이 멈춘 검은 숲 테네브라스에서 태어난 그레인 위도프. 그는 어린 시절 짧은 인연으로 인해 가론 제국의 태제, 루셀에게 일방적으로 각인하게 된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태제의 출신 성분과 이름뿐. 성년을 맞이한 후 그레인은 황제가 된 정인을 위해 나라에 충심을 다하고자 결심하여 하급 기사로서 제국군에 입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륙을 시찰하는 고된 행군 도중 시작된 반역에 휘말린 그는 졸지에 황제와 단둘이 고립되고, 설상가상으로 갑작스러운 고열에 휩싸여 몸져누운 정인의 몸에서 피할 수 없는 러트의 징후가 나타나게 되는데……. [미리보기] 그레인은 잔뜩 열에 들뜬 채 정신을 잃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주군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가 일방적으로 각인한 비밀스러운 정인의 모습을. “……폐하.” 어쩌면 주군은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반려 이외의 인물과 잠자리를 하지 않겠다는 애틋한 맹세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관자놀이를 끔찍하게 두드리는 짙은 죄악감이 혼란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지나갔다. 그래, 이런 식으로 명줄을 이어가느니 차라리 목숨을 잃는 것이 훨씬 나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황제에게 멀쩡하게 정신이 남아 있었더라면 그를 단호히 거절한 후 초연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히 이기적인 결정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레인은 이대로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않고 죽어 가는 주인을 지켜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 읏.” 평생 궂은일만 해왔던 투박한 손끝이 헐렁하게 흘러내린 황제의 하의를 천천히 끌어 내렸다. 타인의 체온이 닿자마자 견딜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신음을 뱉어 내는 모양 좋은 입술에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뻣뻣하게 긴장한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은밀한 열기가 몸속을 온통 느릿하게 핥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