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의지를 희구한 실존철학자, 남유럽의 키에르케고르
“너는 자살할 수 없어. 너는 내 환상의 산물일 뿐이야.” 사랑에 상처 받은 주인공 아우구스토 페레스는 죽고 싶지만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 자살을 허락하지 않는 작가와 씨름하는 페레스,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와 논쟁하는 소설가의 번뜩이는 대화들. 독특한 구조와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이 뜻밖의 결말을 빚어내며 독자에게 신선한 문학적 충격을 안긴다. 불멸에 대한 집념과 인간 자아에 대한 믿음, 변하지 않는 사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우나무노의 희비극이 전하는 심오한 의미들, 그리고 지성과 감성, 믿음과 이성 간의 갈등을 고민한 철학자의 사상 세계가 펼쳐진다.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재치로 가득한 우나무노의 메타픽션은 철학이 흥미로운 것임을 보여 준다. 삶의 동적인 시간성을 글쓰기라는 언어 구조 안에 역동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우나무노는 소설 형식을 혁명적으로 전복한다. 『안개』는 구체적 인간을 어떻게 언어라는 구조로 형상화하느냐라는 우나무노의 인식론과, 장르라는 추상적인 일반화를 거부하는 그의 실존론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안개』에는 “인간적”이거나 “인간성”이라는 애매한 개념이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이 살아 있다.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교육자, 철학자로 20세기 스페인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다. 바스크 지방 빌바오에서 태어나 인스티투트 비스카이노를 다녔다. 1880년 마드리드 대학교에 들어가 4년 만에 철학 및 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6년 뒤 살라망카 대학교의 그리스어 및 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1901년 살라망카 대학교의 총장의 되었으나 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여 해직되었고, 프랑스로 강제 추방당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 독재 정권이 무너진 후에 살라망카 대학교로 돌아왔으나, 1936년 10월 프랑코의 팔랑헤 당원을 비난했다가 또 학교에서 쫓겨나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렇게 정치적 희생자가 된 우나무노는 두 달만에 심장병으로 눈을 감았다.
우나무노의 작품으로 <삶의 비극적 감정>(1913)과 <돈 키호테와 산초의 생애>(1905), <그리스도교의 고뇌>(1924),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아벨 산체스>(1917) 등이 있으며, 화가를 탐구한 시 <벨라스케스의 예수>(1920)는 현대 스페인 시의 뛰어난 본보기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