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이해하는 가장 정교한 스케치
극도로 간결한 문장과 청빈하고 고독한 생애,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사유, 생전에 출간한 단 한 권의 책으로 현대철학의 물길을 바꾸어놓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그를 두고 ‘시인과 작곡가, 극작가, 소설가의 철학자’라 말했다. 마치 입체파 화가처럼,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감독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철학적 소견을 중첩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입체파 화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낯섦과 난해함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2006년, 홀로 7권의 『비트겐슈타인 선집』을 완역하여 철학자로서의 비트겐슈타인뿐만 아니라 삶과 세계를 관조하는 사색가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을 소개한 바 있는 이영철 교수가 그의 철학적 사유 여정을 추적한다. 마치 (철학적) 공해와 안개가 뒤섞여 혼탁한 도시로의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에 저자 이영철이 뛰어든다. 그의 모든 저작을 돌아보면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포인트에 서서 저자가 바라본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고 새로운 철학을 모색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여정을 심리철학과 윤리학, 종교철학의 측면에서 찬찬히 톺아보며 여행의 풍경 속에 들어가 나름대로 스케치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저자는 스스로 이것이 그의 철학 전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안개와 공해가 낀 전체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가장 난해한 철학자의 사유 여정을 만나는 방법이라고 본 것이다.
철학을 뒤덮고 있는 구름 전체는
한 방울의 언어 이론으로 응축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크게 두 번에 걸쳐 열매를 맺었다. 전기와 후기의 사상을 대표하는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가 그것이다. 같은 나무에서 열렸으나 두 열매의 맛은 완전히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마치 가지치기나 접붙이기를 통해 원래의 나무가 더욱 튼튼해지고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첫 번째 열매는 견고해 보이는 겉모습처럼 누구나 따서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달린 열매는 같은 뿌리의 나무에서 나왔지만 탐스럽게 속이 꽉 차 누구에게나 손닿을 수 있는 곳에 달려 있는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같은 뿌리를 둔 열매다. 다시 말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은 그의 전기 사상이 익어 손닿는 곳으로 왔다고 보아야 한다. 당연히 초기 사상과 함께 살펴야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논리-철학 논고』는 극도로 절제되어 군더더기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사고의 표현(언어)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고 선언한다. 사유의 한계를 분명히 하려 한 칸트의 ‘이성 비판’과 비슷하면서도 구별되는, ‘언어 비판’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말이고 무엇이 의미 있는 말이 아닌지를 가려, 언어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이려고 했다. 당시까지 언어는 존재하는 무엇인가의 표상이라는 전통적인 언어관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라고 믿었다. 이를 『논리-철학 논고』에서 프레게와 러셀의 현대적 논리 분석의 힘을 빌려 그 오래된, 그러나 직관적으로 머물러 있던 관점을 독창적으로 기초 짓고 체계화한다. 이것이 이른바 ‘그림 이론’이다.
『논리-철학 논고』의 언어 비판은 사유 비판이며, 세계와 삶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즉 삶의 뜻과 삶의 가치를 고찰한다는 의미, 윤리적 고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윤리적인 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림 그려질 수 있는 것인데, 윤리적인 것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지만 중요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형이상학적 시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올바른 철학이라면 이러한 시도가 헛되다는 것을 깨우쳐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무릇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고 정리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도 언어에 대한 고찰이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한 고찰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와 삶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 크게 변화한다. 초기에는 원자주의적이고 유아주의적이었다면, 후기에는 총체주의적이고 맥락주의적인 관점으로 바뀐다. 글의 스타일도 『논리-철학 논고』의 일방적이고 절대적 선언과 같은 형태로부터 내적인 대화의 형태로 변모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탐구는 ‘언어놀이’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언어놀이’는 어린아이들이 모국어를 배우는 놀이나 어떤 하나의 원초적 언어, 또는 언어와 그 언어가 뒤얽혀 있는 활동을 말하는데,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태의 일부임을 부각하고자 한 것이다. 즉 후기에 접어든 비트겐슈타인이 관심을 둔 것은 우리의 자연사적 삶과 실천이다.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다
그리고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다
1차대전에 참전한 비트겐슈타인은 전장에서 『논리-철학 논고』를 완성한다. 그리고 호기롭게 철학의 종언을 선언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문제가 대부분 언어의 논리나 문법에 대한 오해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논리-문법적 문제를 해결하면 오랜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전통적인 인식의 문제나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뜻의 해명으로 눈을 돌렸다. 이러한 전환은 ‘진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뜻에 대한 물음으로의 이행’으로 철학의 물길을 돌려놓았다. 이를 두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우리의 오성에 걸린 마법에 대한 하나의 투쟁”이라고 이야기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문법적 고찰을 통해 철학을 바라보려 한 이유는, 철학을 일상 언어로 되돌려 보내 종국에는 더 이상 철학이 따로 필요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트겐슈타인이 추구했던 철학은 우리의 일상적 삶이 곧 철학적 삶이 되고, 철학적 삶이 곧 일상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문법적 탐구로서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명료화를 추구하는 실천적 활동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명료화 작업인가? 비트겐슈타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가 성취하거나 추구한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언어 비판과 해명은 물론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의 목적과 의의는 더 넓은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목적이 ‘가치의 전도’에 있다고 보았다. 철학적 명료화 작업이 결국 가치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가치의 영역을 그 나머지로부터 명확히 경계 지음으로써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세계)을 가치 있게 만드는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추구했던 철학의 종언이며 새로운 철학의 모색이었던 것이다.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런던대학 킹스칼리지와 독일 에어랑엔대학에서 연구 교수를 지낸 바 있다. 저서로 도널드 데이빗슨의 언어철학을 다룬 《진리와 해석》(1991)이 있고, 번역서로 비트겐슈타인 선집(2006) 전 7권과 역시 비트겐슈타인의 《미학·종교적 믿음·의지의 자유에 관한 강의와 프로이트에 관한 대화》(2016)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