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주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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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의 안팎을 파고드는 강렬한 언어





인간 내면의 고독과 열정을 치열하고 대담한 언어로 그려온 김태형 시인이 7년 만에 세번째 시집 『코끼리 주파수』를 출간했다. 스무세살의 나이에 등단, 특유의 관찰력과 젊은 시의 역동성으로 주목받은 그는 인간의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파고드는 초기의 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좀더 다양하고 폭넓어진 시편들을 짜임새 있게 묶어 이번 시집에 담았다. 때로는 거칠고 가파른 언어로 때로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생의 안팎을 가로지르는 그의 시들은 삶의 근원을 찾아가려는 시인의 행로 곳곳에서 제각기 고유한 시적 에너지를 발한다.





그의 시는 늘 에둘러가는 법이 없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주변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문제의 영역을 확장하는 대신, 그 ‘본질’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겠다는 강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이는 오랜 시간 자기 기원을 탐구해온 시인이 의도적으로 택한 전략이기도 하다. 삶의 기원에 대해, 인간이 마주한 이 세계에 대해,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할 현실의 기억에 대해 시인은 전면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눈먼 취한 사내가 가파른 골짜기에서 힘겹게 걸어나올 때 // 이 메마른 모더니티로부터 / 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 그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지난밤의 잃어버린 샘 / 은빛 사막을 떠돌던 꿈의 망명객이 하나 앉아 있다// 두 손 모아 이 고요한 샘물을 떠먹을 수는 없다(「샘」 부분)



이는 일견 힘겨워 보이기도 하다. 시인 스스로 “같은 종족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이 현실 세계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늘 “더러운 굶주림을 벗어나지 못”(「들개」)한 채 먹을 것을 좇아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속물적인 것으로 축소시키거나 간단히 초월하는 대신, 그 현실 속에서 분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시인이 대결하고자 하는 가장 정직한 “내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미친개가 내 안에서 또 / 더러운 이빨로 생살을 찢고 기어나오는지 / 나는 두 눈으로 똑바로 봐야 한다 /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는 것보다 / 그래도 보이는 주먹이 더 견딜 만하다 / (…) / 부러진 손가락에 글러브를 끼고서라도 링 위에 올라야 한다 / 그래야 보이지 않는 주먹이 / 더이상 나를 향해 / 카운터펀치를 날리지 못할 것이다 / 어느 순간 좁은 링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한다 / 야유와 빈주먹만 날리던 링 밖의 내 얼굴이 보인다(「권투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부분)



이렇듯 자기와의 대결을 선포한 시인은 온몸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코끼리의 울음소리를 아주 미세한 떨림을 통해 감지하는 코끼리(「코끼리 주파수」)처럼, 혹은 진흙 먹은 울음소리로 자기를 뚫고 가는 지렁이(「내가 살아온 것처럼 한 문장을 쓰다」)처럼, 자신의 몸과 삶을 온전히 흔들어 이러한 대결을 계속해나가겠다는, 그럼으로써 새로운 문장을 써나가겠다는 강렬한 의지는 그 자체로 감동을 선사한다.




팽팽한 공기 속으로 더욱 멀리 울려퍼지는 말들 / 너무 낮아 내겐 들리지 않는 / 초저음파 십이 헤르츠 / 비밀처럼 이 세상엔 도저히 내게 닿지 않는 / 들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 있다 / (…) / 나무껍질과 마른 덤불로 몇해를 살아온 나는 / 그래도 여전히 귀가 작고 딱딱하지만 / 들을 수 없는 말들은 먼저 몸으로 받아야 한다는 걸 / 몸으로 울리는 누군가의 떨림을 / 내 몸으로서만 받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코끼리 주파수」)



이처럼 시인은 묵직한 언어로 자기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끌어오는 한편, 일상 속에서 분주히 생활하는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 상상」 「오리몰이」 등의 시에서는 그의 시쓰기가 어떠한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발랄하고 경쾌한 문법으로 노래한다. 이 시들이 전하는 생활의 무게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시인으로서의 길을 운명이자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자세가 담담히 드러난다.




틈만 나면 뉴스를 검색하고 저녁 드라마를 틀고 / 제발 그따위 것들 좀 집어치우라고 / 큰소리치면 모두 잠들고 나면 / 이번엔 단 한 명의 손님만 받는 / 외로운 주점이 문을 연다 / 허무주의자로 돌아와야만 어제 쓴 문장이 해독되고 / 밤의 리얼리스트로 돌아와야만 / 채 마치지 못한 다음 문장을 이어쓸 수 있는 곳 / 그때서야 악착같이 내 책상이 되는 이곳 /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새와 다람쥐와 여우가 앉아 있다 / 발바닥이 종일 즐거운 두 마리 망아지와 / 꼬리도 없이 튀어나온 잔소리가 / 그리고 또 내가 한가족이 되어 있다(「공유지의 비극」 부분)



『코끼리 주파수』에는 단 한 권의 시집이 담아냈으리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꽤 진폭이 큰 시들이 담겨 있다. 이는 시인이 7년 동안 고심어린 작품쓰기에 매진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시인 스스로가 시학적 성격을 의식하는 시인으로서 ‘이번 시집에서도 서정적 주체의 내면적 드라마를 구성했기’(이성혁 해설) 때문이다. 시집의 초반부에서는 다소 격정적이고 강한 언어를 구사하며 혹독한 고독의 여정으로 독자를 이끌었던 시인은 후반부에 이르러 한층 감성적이고 섬세한 시들을 선보이며 그동안의 상처를 보듬어준다. 시인의 손에 이끌려 강렬한 서사로 새롭게 탄생한 시편들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다채롭게 빛을 발하는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누가 이렇게 헤어질 줄을 모르고 / 며칠째 머뭇거리고만 있는지 / 대체 무슨 얘길 나누는지 멀리 귀를 대어보지만 / 마치 내 얘기를 들으려는 것처럼 / 오히려 가만히 내게로 귀를 대고 있는 빗소리 / 발끝까지 멀리서 돌아온 / 따뜻한 체온처럼 숨결처럼 / 하나뿐인 심장이 두 사람의 피를 흐르게 하기 위해서 / 숨 가쁘게 숨 가쁘게 뛰기 시작하던 그 순간처럼(「당신이라는 이유」)


Changbi Publishers

About the author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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