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조작 간첩 피해자들이 당한 억울한 사정과 당시 군사 정권의 어두운 그늘과 부도덕성이 낱낱이 드러나다” 올해는 ‘11·22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된다. 그러나 2010년대를 사는 우리에게 ‘11·22사건’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1·22사건’은 한국인의 기억에서 지워져 있다. 아니 애초부터 입력돼 있지 않았으니 지워졌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해인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는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국내 대학에 침투한 재일동포 간첩 일당 21명을 검거했다”고 언론에 공표했다. 이 사건은 당시 재일동포 사회를 공포와 충격 속에 몰아넣었고, 그 상처는 지금도 온전히 아물지 않은 채 봉합돼 있다. 불행히도 ‘11·22사건’은 단막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독재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거세져 정국이 불안해지거나, 대학가에서 반정부 시위가 활발해질 조짐이 보이면 유학생 사건은 마치 주문생산이라도 하듯 어김없이 나타났다. 물론 재일동포 유학생이 간첩 사건에 휘말린 것은 ‘11·22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1971년 4월 대통령선거 직전 발표된 서승·서준식 형제 사건이다. 형제가 함께 구속된 데다 가혹한 고문 의혹이 제기돼 일본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서승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서준식의 목숨을 건 옥중 전향공작 고문 폭로와 장기간의 보안감호처분으로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건이다. 또한 재일동포 사건은 유학생만이 전부가 아니다. 학자, 교수, 기술자, 언론인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사건에 연루됐다. 멀리는 1961년 민족일보 사건, 집권당 국회의원이 간첩으로 구속된 1969년 김규남 사건 그리고 2014년 봄 이란 연극 상연으로 다시 조명을 받은 1974년 울릉도 사건도 다 연관이 있다. 재일동포 사건은 오랜 기간 국내에서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정보기관들이 요란하게 발표했던 사건들이 있는 반면, 1심부터 상고심까지 사형선고의 행진이 계속된 사건조차 재판 과정이나 선고 내역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것들도 제법 있다. 그래서 20대 젊은이들이 감옥에서 수갑을 찬 채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불안에 떨고 있어도 국내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은 법정에서도, 언론에서도 외면받았고, 옥중에서도 국내의 ‘민주인사’와 분리돼 고립됐다. 재일동포 사건의 피의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줄 사람은 국내에 없었다. 2000년대 들어 재일동포 사건에도 뒤늦게나마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 2010년 말 재일동포 간첩조작의혹 사건의 재심을 전담하는 법률가 조직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이석태 변호사를 비롯한 민변 변호사들로 ‘재일동포재심변호단’이 꾸려져 재심을 통해 피해자의 무죄판결과 명예회복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