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신, 그는 나쁜 남자였다. 그러나 순수한 영혼을 지닌 정열적인 꽃 재서와의 만남과 이별을 거쳐 그 안에 사랑으로 담았다. 발췌글 “어디 아파요?” 재서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으려는데 그가 밀쳐냈다. 그의 낯선 거부로 인한 상처가 재서의 눈빛에 아스라이 젖어들었다. “날 찾아온 용건이 뭐지? 난 충분히 너에게 내 뜻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데.” 어렴풋이 가졌던 짐작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의 스침에 심장 언저리가 아파 왔다. 재서는 그가 밀쳐낸 두 손을 꽉 마주 잡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가 한 건 섹스뿐이었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저 입을 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재서는 그럴 의향인 듯 마주 잡은 손을 떼어 힘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섹스만 하면 되지, 갑자기 날 피하는 이유는 뭐죠?”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듣는 여잔가, 너는?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데 별다른 이유가 뭐 있겠어? 한마디로 싫증이 난 거지. 만나서 섹스만 하면 된다고? 아니, 한 여자랑 하는 섹스도 금방 싫증 나 버리더라고. 네가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여자한테 싫증을 잘 내거든. 이유라면 그게 이유인 것 같군.” 그의 유들유들한 말솜씨에 재서는 부들부들 떨었다. “싫증이 나서라고요? 그러네요, 싫증난 여자랑 어떻게 계속 만나서 밥 먹고 이야기하고 섹스 하겠어요. 그게 이유란 말이죠?”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가 이런 남자였을까. 아니라고, 그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면 좋을 텐데. 그건 그저 그녀의 바람이었다. 재서는 상처 입은 눈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 안에 항상 있었던 제 모습이 이제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다른 이유가 더 있기를 바라는 건가?” “……모르겠어요.” “이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쿨하자고. 남녀가 만났다가 헤어지는데 모두 너 같이 찾아와서 따지고 든다면 어느 남자가 연애하고 싶겠어, 안 그래? 그러니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라고.” 그가 얄미웠다. 잘생긴 얼굴도, 조롱하는 저 입도. 참을 수 없었던 재서의 손이 그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네요, 똥 밟았네요. 내가.” 재서는 이 공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이면 될 것 같은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재서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다리에 힘을 주어 현관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그동안 고마웠다.” 어느새 뒤따라온 그의 깐죽대는 목소리에 재서는 문고리를 잡은 채 휙 뒤돌아섰다. “나쁜 새끼!” 잇새로 낮게 내뱉으며 재서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방 안으로 퍼져 나간 소리와 함께 재서는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아서 나와 버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구색을 맞추듯 어느새 밖에는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재서는 어두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혀 비에 흠뻑 젖어들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