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옥

· 창비시선 Book 504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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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은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녹아 물이 되듯이”

 

이 시대가 사랑하는 감수성,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위로의 언어

세상의 바닥과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서정시의 힘

 

 

“박소란의 언어적 감수성은 단일하지 않다. 도시적인 연출력과 세련된 어법이 돋보인다.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으려고 고투한 흔적이 역력하다. 거기에 노래도 있고 이야기도 있다.” 한국 시단에 박소란이라는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형 시인의 등장을 알린 2015년 신동엽문학상 심사평의 일부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한층 더 섬세해진 언어적 감수성으로 주변의 아픔을 응시하는 동시에 “조금더 살기 위”(추천사, 정선임)한 따듯한 힘을 주는 박소란의 네번째 시집 『수옥』이 출간되었다. “물 수(水) 구슬 옥(玉)”(「물음들」). 다소 낯선 제목이지만 슬픔과 눈물, 그 안에서 빛나는 찬란하고도 둥근 사랑의 마음이라는 이번 시집의 정서를 포괄한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사회의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내온 전작과 비교하자면 『수옥』은 좀더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인의 자기 체험을 넘어 보편적인 슬픔과 상실의 정서에 정확히 가닿는 덕분에 아련한 동시에 마음 한편이 뭉클해지는 독서 경험이 가능해진다. 또한 3부로 나눠 실은 시편들은 순서대로 읽었을 때 언젠가 경험해본 듯한 분절적인 기억을 자극하는 서사를 재구성해낸다. 시집을 읽음으로써 독자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또한 『수옥』이 제공하는 커다란 매력이다. 시집의 말미에는 해설 대신 시인 본인의 산문 「병과 함께」를 실었다. 생활에서 길어 올린 담담한 어조 속에 드러나는 시적인 독백이 단숨에 몰입감을 선사하는데, 조용한 위로가 되어주는 한편 여타 시집에서 찾아보기 힘든 읽을거리가 된다.

 

독자를 마음을 빼앗는 공감의 언어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마음에 대하여

 

무언가를 관찰하는 화자들의 시선은 마음을 뺏는다. 둘러앉은 이들 사이에서 혼자 몰래 빠져나가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의 뒷모습이 신경 쓰여 “내가 다 잘못했어요/말하고 싶어”(「수」)하는 모습이나, 편의점 옆 테이블에서 컵라면을 먹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이 신경 쓰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빈 박카스 병을 이리저리 굴”(「24시」)리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순식간에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감정이 이입된다. 물론 저마다의 방식으로. ‘왜 그때 다정한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을까.’ ‘왜 그때 무심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을까.’ ‘왜 주변을 향해 화를 내지 않았을까.’ 과거의 어떤 장면을 향한 ‘왜’가 연달아 떠오른다. 그것은 『수옥』이 그만큼 공감의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수옥』의 화자는 무언가를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는다. 움직이고, 생각하고, 또 반성한다. “‘삶은 여행’이라는 말,/‘여행’이 꼭 ‘미행’ 같아 지금껏 몰래 누군가의 뒤를 밟아온 것만 같아/그래서일까/이토록 죄지은 기분”(「서해」) 같은 구절을 읽다보면 ‘살아 있다’는 의미를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정서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삶의 상실이 주는 슬픔이 지나간 이후, 삶이라는 것이 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인식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선임 소설가가 “소란 속에서 침묵을 지키다 돌아올 때, 병원 복도에 홀로 앉아 호명되기를 기다릴 때, 봉분 앞에 바래버린 조화를 새것으로 바꿔놓을 때, 알 수 없는 허기에 식당을 찾아 어두운 골먹을 헤맬 때, 미래라는 것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럴 때면 시인의 시집을 꺼낸다”(추천사)고 쓴 것도 이러한 정서와 맞닿는다.

 

시인은 “내 시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물 수(水)에 구슬 옥(玉)을 써야지 생각했다./아주 오래전부터”라고 「시인의 말」에 썼다. 그만큼 이번 시집은 시인의 한 시기를 매듭짓는 동시에 박소란 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한권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바닥을 어루만지며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위로를 건네던 시인은, 이제 자신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을 좀더 따뜻하게 보듬기 시작했다. 그 따뜻함이 물처럼 구슬처럼 흐르고 또 머무른다.

“바닥의 표정은 어둡습니다. 고단합니다. 어쩌면 정말 위험하겠지요. 미끄러질 수도, 크게 다칠 수도 있겠지요. 철철 피를 쏟게도 되겠지요. 그래도 가끔은 이 어두운 물기가 삶의 신호 같다고 느낍니다. 살아 있음의 적나라한 신호.”(산문, 「병과 같이」 부분)

 

 

차례

 

제1부

티타임

행인

옛날이야기

재생

불행한 일

한 사람의 꽃나무

공작

기차를 타고

 

제2부

당신의 골목

갑자기 내린 비

스탠드 아래

물을 계속 틀어놓으세요

조각들

분실

사람의 얼룩

먼 곳

공터

노래

그 병

자취

××

여름 노트

생략

무서운 이야기

하향

누수

러브덕

후경

물과 구슬

서해

낙장

노래들

24시

나의 병원

간병

옥상에서

그냥 걸었다는 말

 

제3부

겨울 노트

옥춘

온수

눈보라

물가에 남아

내자동

세수

메모

건빵을 먹자

달걀

물음들

내일의 기다란 꼬리

병중에

소란

 

산문|병과 함께

시인의 말

 

 

책 속으로

 

컵을 들고 헤매다

쏟아버린 물

 

실내는 따뜻하고

둘러앉은 이들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사이 몰래 빠져나가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의 뒷모습

 

나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내가 다 잘못했어요

말하고 싶어서

―「수」에서

 

 

어떤 물은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녹아 물이 되듯이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을 오래 간직해야지 하는 생각

소복을 입고 아슬랑거리는 겨울처럼

겨울의 외딴 정류장처럼

 

버스는 오지 않겠지만

―「공작」에서

 

 

기다렸다는 듯

우산을 꺼내 펴는 것이다

조금도 놀라지 않고 허둥지둥하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

 

등이나 어깨가 살짝 젖는 건 자연스럽고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제법 그럴듯한 지도가 하나 생겨날 때까지

―「갑자기 내린 비」에서

 

 

혼자서 밥을 먹는데

맞은편에 한쌍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아두는 이유

 

숟가락에 번진 살색 얼룩을 재차 문지르는

 

아침이면

말라비틀어진 조각들이 창가에 흩뿌려져

있다 먼 빛을 건너다보며

 

끝내 그 투명한 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밥을 먹는다

투명한 벽 너머 투명한 벽을 떠올리며

―「자취」에서

 

 

물을 따른다

물잔에 어린 얼굴은 울었다 웃었다 쉼 없이 출렁이고

꼭 진짜 같고

 

눈가에 스멀거리는 송충이 같고

 

나를 덮친다

고요한 책장을 부순다

 

우글우글 알을 까는 초록

 

우글우글 죽는다

썩는다,

가짜는 썩지 않는다

―「여름 노트」에서

 

 

웅그린 몸을 더 힘껏 웅둥그린다

꿈에서도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기어이 들키려

 

빗속을 헤맨다

표정을 연습하는 물방울과 같이

 

다시 아침이면

마른 종이 위 퍼렇게 뭉개진 글씨,

그 그렁그렁한 얼굴을 데리고

천천히 문을 나선다

―「누수」에서

 

 

‘삶은 여행’이라는 말,

‘여행’이 꼭 ‘미행’ 같아 지금껏 몰래 누군가의 뒤를 밟아온 것만 같아

그래서일까

이토록 죄지은 기분

 

바다는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데

온갖 신비가 부신 지느러미를 흔들며 산호 틈 곳곳에 숨어 있다는데

 

해변에 앉아 생각한다

―「서해」에서

 

 

부고가 왔다

네가 죽었다고, 겨울 늦은 밤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사탕 하나를 물고 있는데

잠들지 못한 내 오랜 습관이지 사탕은, 어릴 적 어느 제상에선가 훔쳐 온 것

 

달다, 달다, 하면서

―「옥춘」에서

 

 

곧 잠들 수 있을까

 

나는 묻고

너는 답하지 않는다

나는 묻고

너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칠 수 없고

흔한 열병을 앓는 것뿐인데

 

묻고

또 묻는다

 

너는 대체 누구였을까

―「눈보라」에서

 

 

죽음은 구멍 난 이파리처럼 가볍다

시간이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

 

야윈 돌배나무가 몇개의 고단한 얼굴을 떨어뜨린다

돌배는 쓰지도 달지도 않다

때가 되면

 

우물 위에 반듯이 누워

긴긴 헤엄을 연습한다

―「물가에 남아」에서

 

 

눈물 자국이 만든 얼룩을 보았지

 

오래된 수건으로 무심코 뺨을 문지르고 목덜미를 쓸다

거기 생겨난 한 사람의 표정을

 

글썽이는 눈동자를

 

아아 이제 나는 어디서든 그 얼굴을 만날 수 있겠네

눈을 맞출 수 있겠네

울고 난 뒤라면 언제 어디서든

 

나는 사랑을 하겠다

눈물이 맺어준 사랑

―「세수」에서

 

 

추천사

 

그럴 때면 시인의 시집을 꺼낸다. “몇몇은 울고/몇몇은 아주 취해버린 것 같았”던 소란 속에서 침묵을 지키다 돌아올 때 면, 병원 복도에 홀로 앉아 호명되기를 기다릴 때면, 봉분 앞 바래버린 조화를 새것으로 바꿔놓을 때면, 알 수 없는 허기에 식당을 찾아 어두운 골목을 헤맬 때면, 미래라는 것이 “너무 어렵고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래서 “머리 맡에 쏟아져 질벅이는 슬픔을 가만히 문지르는 새벽”이 찾아올 때면.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 사람은 “불행, 힘내,”라고 속으로 웅얼거리고 “말갛게 떨어진 잎사귀를 가만히 주워” 들어 “서랍 깊숙이 약처럼 넣어둔다”. “눈물이라는 재료를 수집해 접고 오리고 붙이는 데 긴긴 하루를 쓰는” 그 사람은 “소용을 다한 마음 따위”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며 생기로 가득한 여름 속에서도 오래전 뙤약볕 아래 녹아버린 사람들을 기억한다. 라면을 먹다 울고 있는 이의 곁에서 “팅팅 부어오른 용기 속 뜨거운” 눈물을 얻어 마시고 행인의 욕설에서도 노래를 발견하고야 마는 그 사람은 막차를 타고 낡은 방으로 돌아온다. 길 위에서 “느닷없이 찾아들 어떤 물음”들을 기다리던 그 사람은 결국에는 기어코 “한다발 눈물처럼 일렁이는” 강에서 “물 수(水) 구슬 옥(玉)” 사람의, 아니 사랑의 이름을 길어내고야 만다. 찰랑거리도록 채워 “슬픔에 잠긴 여행자에게” 건넨다. 오늘도 꺼내 마신다. “목구멍 깊숙이 들이쉴 한번의 숨을 위해”서다. 아껴 마신다. 조금 더 살기 위해서다.

정선임 소설가

 

 

시인의 말

 

내 시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물 수(水)에 구슬 옥(玉)을 써야지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눈물은 나의 어머니, 나의 집.

나를 기른 단 하나의 빛.

 

멋대로 가져와 붙인 이 이름이 나를 모조리 삼키기를 바란다.

나를 삼키고 새로 태어나기를.

원 없이 살아가기를.

 

수옥, 수옥만을 나는 바란다.

2024년 6월

박소란


About the author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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