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을 1차 대전에서 2차 대전으로 옮긴 것 외에도 브레히트는 파시즘에 대한 저항 형태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사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교차시키는 새로운 연극 형식을 시도했다. 히틀러와 같은 "높은 차원"의 인물들과 슈베이크 같은 "낮은 차원"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을 나란히 배치해 대비함으로써 두 세계의 관계를 드러냈다. 그에 따라 희곡은 원작 소설보다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특징을 보인다. 브레히트의 슈베이크는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저항한다. 슈베이크는 뛰어난 언변으로 체제를 옹호하는 듯 파시즘의 실체를 폭로한다. 브레히트는 슈베이크를 통해 파시즘에 저항하면서도 살아남을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원작과 개작의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차이는 ‘발룬’이란 인물 설정이다. 하셰크의 원작에서 에피소드적인 인물로 등장했던 발룬은 브레히트의 개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발룬의 식욕은 자본주의적 소시민의 생리와 파시즘의 관계를 상징한다. 안락함을 추구하는 발룬에게서 파시즘에 순응하는 소시민 계층의 전형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이처럼 브레히트의 "슈베이크"는 원작과 다르다. 파시즘에 대한 비판, 소시민 계층의 태도, 자본주의와의 관계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부각하고 있다.
한편 컨베이어를 이용한 행군 장면은 연극사에 혁신적인 연출로 평가된다. 슈베이크가 컨베이어 위를 쉬지 않고 걷는데 전체 무대에서 그의 위치는 항상 제자리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 무대라 할 수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거쳐 1908년 아우크스부르크 김나지움에 입학한 그는 이미 15세 때부터 시 작업을 시작해 학생 잡지 ≪추수≫를 발행하는 등 친구들과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고 이 활동을 통해 그의 문체는 도발적이 된다. 이때 같이 활동하던 판첼트, 카스파르 네어, 뮌스테러 등과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특히 카스파르 네어는 망명에서 귀국한 브레히트의 무대를 만들었다. 1928년에는 <서푼짜리 오페라>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둠으로써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나치 집권기인 1933년 2월 28일 망명길에 오른 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미국을 전전하면서 15년간 독일 외부에서 활동했다. 1948년 동베를린으로 귀환한 뒤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1949)을 공연하여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 부인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린 앙상블을 창단하여 연극 작업에 몰두하다가 1956년 8월 14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김기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 대학교 철학부 독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 한국학과 전임 강사, 성신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동 대학교 명예 교수다. 번역한 책으로 《서사극 이론》, 《메피스토》, 《마하고니시의 번영과 몰락》, 《아르투로 우이의 집권》, 《사춘기》, 《속바지》, 《스놉》, 《깨어진 항아리》, 《탈리스만》 《카이트 백작》, 《윤무》, 《민나 폰 바른헬름》, 《세계 제2차 대전 중의 슈베이크》, 《거짓말하는 자 벌받을지어다》, 《아름다운 낯선 여인》 등이 있다. 《20세기 초 독일 연극과 동양》(독), 《한국의 독일 문학 수용 100년》 중 희곡 수용에 관한 글들, 독일 연극의 동양 수용, 한국의 독일 문학 수용, 독일 드라마, 독일 희곡 작품 해석, 독일 여성 문학, 독일 신화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