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 고독

· 창비시선 Book 430 · 창비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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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째서 어떻게 무엇이 그토록 너였느냐고

나는 반백년 후에나 중얼거린다”

 

순간이자 영원, 없는 당신과 무수한 나

세계와 인간을 감싸안는 독창적이고도 깊은 통찰

 

1989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독특한 발상과 이질적인 화법으로 독창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이경림 시인의 신작 시집 『급! 고독』이 출간되었다. 올해로 등단한 지 만 30년, 시인의 생애 여섯번째 시집이다. 8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우연의 순간에 문득 생겨나고 움직이고 사라지는 존재들의 근원을 촘촘히 파고든다.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는 생(生)의 내밀한 풍경을 다채롭게 그려내며 독자를 한층 풍요로운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불교의 사유를 일상의 이야기로 재구성한 존재론적 성찰”(김수이, 해설)이 돋보이는, 독창적이고도 깊은 사유가 담긴 시편들이 매력적이다.

“당신은 벌써 도착했다구요?”

없는 당신을 만나고 사랑하기 위해 쓰는 시

 

칠순을 넘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활달한 상상력과 실험적인 어법이 도드라지는 이경림의 시는 ‘유쾌한 발상’과 같다. 시인은 때로는 유머와 위트가 섞인 거침없는 입담으로 “위태롭고 안온해서 아름다운”(「눈이 와서」) ‘지금-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일과 서로 사랑하는 일을 이야기한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삶’은 대체 무엇인가.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 시인은 “엑스트라 배우만도 못한”(「에스토니아인 대천사의 장난」) 생을 감싸안는다. 그것은 곧 ‘시’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질긴 삶 속에서 오랫동안 붙들어온 질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뇌와 번민이 가득한, “어지러운 생각들이 잡고 가는 컴컴하고 기다란 길”(「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불립(不立)과 불면(不眠)의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이경림의 시가 오랫동안 붙들어온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삶은 진창에서 뒹구는 지렁이와 다를 바 없고, 우리는 “천지에 널린 고독 사이를 흘러다니”(「기수급고독원」)며 고독해진다. 시인은 묻는다. “아아, 그때, 우리/이목구비는 계셨습니까?/주둥이도 똥구멍도 계셨습니까?”(「지렁이들」)

 

시인은 “하고많은 목숨의 윤곽들이 거짓처럼 지워져도 그 울음만은 지우지 못하는 비밀”(「발광」)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울음뿐이었던 한생을 기억해”내고 “내용도 없이 미친 이 사랑”(「습(習)」)에 기대어 비로소 존재하고 살아가고 사랑할 힘을 얻는다. 결국 살아간다는 건, 질기고 긴 수천갈래 길 위에서 존재의 근원을 찾아 ‘무지공처(無地空處)’를 떠도는 일, 무수히 많은 나와 네가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며 함께 존재하고 사랑하는 일, 그러다 문득 ‘급! 고독(孤獨/高獨)’을 맞닥뜨리는 빛나는 순간이 찾아오는 일임을, 이 시집은 다채로운 목소리를 통해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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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천지에 널린 고독 사이를 흘러다니다

급(給), 고독(孤獨)하여

급(急), 고독(高獨)이 된 그를, 나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기수급고독원」 중에서

 

 

어쩌다, 무엇 때문에, 백만번이나 죽었는지

백만번이나 태어났는지

백만번 생각해도 모를 일

 

나는 다만 저녁의 마트에서

백만번 죽은 브로콜리와 백만번 태어난 콩나물과

백만번 죽은 시금치와 백만번 태어난 돼지고기와 고등어를

사 들고 와 백만번째 식탁을 차릴 뿐

―「만찬」 중에서

 

 

어째서 저 광대무변의 한 토마토와 터럭보다 작은 토마토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다만 그 이름이 토마토일 뿐인 저

수천수만 토마토들의 물음은 끝이 없고 다만 그 이름이 물음일 뿐인 물음들의 물음은 끝이 없구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중에서

 

 

돌과 연애하고 싶다

얼음 같은 돌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싶다

두 눈에서 쏟아지는 용암으로 돌의 늑골을 녹이고

화석이 된 돌의 염통을 깨우고 싶다

―「돌들의 다다이즘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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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이경림의 시 세계에서 정지하는 것은 없다. 정리되는 것도 없다. 그는 근원에 가닿아보려고 사물의 주변을 맴돈다. 반복하며 돌고 열거하며 돌고, 한 세계의 근원 속으로 나사못 돌리듯 파고들며 핵심에 가닿고자 한다. “길은 수천갈래”이고, 말은 막아둘 수 없어서 튀어나온다. 거침없는 그 말들은 나이가 없다. 아이의 말이기도 하고 노인의 말이기도 하다. 남자의 말이 되었다가 여자의 말이 된다. 그는 순간 속을 걸으며 한세기를 지난다. 그 시간 속에서 “대서특필된 뉴스가 삼천년째 공중을 돌고 있어”라고 쓴다. 그래서 그의 시간은 “백만번 죽었다가 백만번 태어난 아침”이고, 그의 공간은 “눈꺼풀 속의 뽀르뚜갈” 같은 ‘무지공처’이다. 시인은 그 무지공처를 혼자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어떤 순간은 ‘급 고독’의 브레이크를 밟기도 한다. 그 시간이 그의 시가 빛나는 시적 순간이다.

최정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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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내가 아버지라는 걸

어머니가 나라는 걸

생이 꼭 같은 상황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걸 눈치채고부터

할 말이 없어졌다

 

나의 무덤 위에 모르는 대나무 두분이 서 있었다

서슬이 시퍼렜다

백만번째 아침을 맞는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별이다

 

2019년 3월

이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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