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복제,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등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예민한 사안의 정당성은 무엇을 근거로 밝힐 수 있는가. 다양성과 다원성이 어느 때보다 존중받고 있는 오늘날 사소한 취향에서부터 사회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공리주의》에서 프로타고라스와 플라톤의 논쟁으로부터 비롯된 철학의 오랜 물음인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한다. 18세기 말부터 급성장한 영국의 자본주의는 극심한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과도한 경쟁과 빈부격차 심화 등의 부작용을 야기했다. 이에 이기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도덕관이 요청됐고 밀은 최대의 사회적 효용을 가져오는 행복이 최고의 도덕적 가치라는 것을 핵심 명제로 하는 공리주의를 제창한다. 거칠게 정의해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옳은 일, 고통을 초래하는 것은 그른 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고통을 싫어하고 쾌락을 추구한다’는 인간관에서 출발하는 밀의 공리주의는 앞선 세대의 쾌락적 공리주의와 차별화된 최대 다수의 행복을 말한다. 개개인이 저마다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인간이 천성적으로 지닌 사회성 즉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 교양을 통해 물질적 쾌락에 빠지지 않고 타인을 배려함으로써 다수의 행복을 보장한다. 이로써 공리주의는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탈피해 사회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지 또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보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밀의 성찰은 철학이 죽어가는 시대, 철학을 폄하하는 사회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2. 새로운 공리주의의 탄생
밀은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과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밀의 공리주의는 벤담의 그것과 다르다. 벤담의 이론은 쾌락을 계량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소위 쾌락 계산법을 통해 행복을 가늠하는 양적 쾌락주의를 제창함으로써 물질 우선적, 개인 중심적 속성을 지닌 공리주의로 이해될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밀은 인간의 발전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이기심을 억제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하는 질적 쾌락주의의 성격을 띤 공리주의로 발전시켰다.
그는 먼저 행복이 최고의 도덕 가치임을 객관화하고자 한다. 이에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지적, 도덕적, 감정적, 미적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판단의 주체라고 상정한다. 이것은 행복을 최고의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확립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에 따르면 행복을 최고의 도덕적 가치로 보는 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의 합리적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밀은 이 객관적 기준에 따라 가치의 위계를 정하고 정신 교양을 통해 열등한 쾌락에 빠지지 않고 타인을 배려함으로써 더 높은 가치의 쾌락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더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더 나은 것이다”라는 밀의 명언은 질적 공리주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본주의 사회의 해법, 공리주의
“누구나 한 사람으로 간주돼야 하고 어느 누구도 한 사람 이상으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는 밀의 말에는 공리주의가 개인에 대한 평등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공리주의는 서구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공리주의는 이해와 판단 방법에 따라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유명한 명제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밀의 공리주의는 단지 감각적 쾌락을 의미하는 행복에 기초하지 않고 전체 사회의 발전을 고려하는 높은 차원의 어질고 너그러운 품성을 뜻한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 공리적 판단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법과 제도, 도덕, 종교 모두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여부에 따라서 운영, 조정된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인류 발전에 막대한 공헌을 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밀의 《공리주의》를 다시 읽고 올바르게 실현하는 것은 온갖 병폐에 시달리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 철학자로 이름난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입식 교육을 피하고 어떤 문제든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도록 아들을 가르쳤다. 밀은 세 살 때 아버지에게서 그리스어를 배웠고 여덟 살 때 라틴어를 배웠으며 열세 살 때는 경제학을 공부했다. 열일곱 살이 되던 1823년에 동인도회사의 통신 심사부장인 아버지의 조수로 임명된 후 이곳을 자신의 평생직장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엄격한 공리주의적 이성 제일주의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면서 아버지의 철학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사색과 분석뿐만 아니라 수동적인 감수성이 능동적 능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러 능력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음악, 시, 미술 등으로 관심의 폭을 확장했다.
10대의 나이에 공리주의 창시자인 제러미 벤담을 도와 《법적 증거의 합리적 근거》(전5권)를 만들면서 저술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한 밀은 그의 첫 저서인 《논리학 체계》를 1843년에 출판했다. 1848년에는 《정치경제학 원리》를 발표했는데, 이 책은 부인 테일러와 함께 준비해 결실을 거둔 첫 책이다.
1859년에는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자유론》을 2년 뒤에는 대중 민주 정치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비판한 《대의정부론》을 발표했다. 이후 사회윤리로 관심을 돌린 그는 《공리주의》, 《여성의 종속》 등을 집필했다. 《종교에 대하여》와 《사회주의에 대하여》는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1865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유권자들의 권유에 따라 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밀은 자신의 소신에 따라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지만, 다음 선거에서는 낙선하고 말았다. 다른 지역에서 출마해달라고 하는 요청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 곧 글을 읽고 쓰는 본업으로 되돌아갔다. 1873년 평생 취미였던 식물채집 도중, 갑자기 병이 생겨 숨을 거두었다. 현재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부인과 함께 묻혀 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라이스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의 이해’, ‘자유주의의 역사’, ‘문학과 정치’, ‘문명과 정치’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한국정치사상학회 회장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다시 시작하는 혁명 : 아옌데와 칠레식 사회주의','자유의 본질과 유토피아 :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사상','자유의 미학 : 플라톤과 존 스튜어트 밀'이 있다. 하이에크의'법·입법 그리고 자유 III'과 토마스 힐 그린의'윤리학 서설'을 번역했고, J. S. 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자유론','여성의 종속','공리주의'를 옮겼으며, 현재'대의정부론'을 번역 중이다. 2004년부터 밀과 토크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민주주의론을 비교,해석하는 2부작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