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 『참말로 좋은 날』(2006)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열한번째 소설집으로 2003년부터 2008년 사이에 발표한 최근작 9편의 단편을 묶었다. 작가 특유의 입담과 재치 넘치는 유머감각은 이번 작품집에서도 여전해서 읽는 페이지마다 독자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한다. 그간의 성석제 소설이 던지는 재미와 웃음에 빠져들다보면 허구와 농담의 경계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다소 비현실적인 인간유형으로 비쳐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작품집이 특별한 것은 재미는 재미대로 느끼는 동시에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주변의 삶들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체감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웃음은 더 리얼하고 그 뒤에 오는 슬픔과 쓸쓸함도 아주 구체적으로 다가와 감동을 선사한다. 삶은 여행과 같은 것, 여행 3부작 이번 작품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유난히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여행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여행」 「설악 풍정」 「피서지에서 생긴 일」을 비롯해, 낚시이야기를 다룬 「낚다 섞다 낚이다 엮이다」와 산에서 죽을고비를 넘기고 기적처럼 살아돌아온 이야기를 다룬 「기적처럼」을 포함하면 절반 이상이 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다. 작가가 유독 여행에 대해 천착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행은 그야말로 삶의 축약판이자 인생의 희로애락과 인간군상의 내면을 잘 드러내는 소재이다. 여행은 대부분 즐거움과 설렘으로 시작되지만 도정에서의 예기치 않은 난관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동물성과 폭력성을 폭발하게끔 하기도 한다. 첫 작품 「여행」은 가까운 고향 친구인 만재 봉수 영덕 세 사람이 무전여행을 결행하면서 시작한다.
무전(無錢)이지만 오래된 우정과 떠남에 대한 기대로 시작한 여행은 돌발적인 사건과 사고를 통해 점차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세 친구 사이에는 교통편 이용(히치하이크)이나 캠핑하면서 부르는 노래, 음식조리 등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갈등과 대립이 끼여드는데, 만재의 배탈은 이들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점점 힘들어지는 여정에서 지친 이들은 만재의 신발이 다 해지자 결국 사찰에서 신발을 훔치게 되고, 무전(無錢)의 원칙을 깨기도 한다. 차츰차츰 드러나는 이들 내면의 이중성은 천곡사 계곡에 이르러서 극대화된다. 굶주린 세 친구에게 친절을 베풀어 온갖 음식과 술을 제공하는 청년들에게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은 것이다. 청년들과 이들의 대립은 아주 단순화하면 계급적 이질성이라 할 수 있다. 태양담배와 물 말아먹는 식사, 무전과 삼류지방대 등이 세 친구의 비루함과 가난을 표상하는 거라면, 반대편에 서 있는 청년들은 양담배와 스포츠카와 위스키, 유전(有錢)과 국립대 등을 갖춘 부르조아지를 표상한다.
그렇다고 기존의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건강성과 부르조아지의 퇴폐가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7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청년들이 더 깨어 있고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를 더 선호하는 한편, 만재 봉수 영덕 들이 더 체제순응적이고 반공적인 사고에 길들여져 있다. 이들을 지배하는 계급적 열등감이나 분노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지 어떠한 철학적 사상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청년들이 학습을 하고 토론하고 친구가 정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 끝에 사망한 것에 대해 패닉상태로 지쳐 있다면, 세 친구는 그야말로 무전과 무식의 여행에서 지친 것뿐이다.
단지 잘산다는 것에 대한 분노는 아주 단순한 담배 음식 자동차 등에 대한 꼬투리잡기식 트집에서 이적성에 대한 마녀사냥으로까지 번진다. 친절과 호의를 일방적인 폭력으로 보답하는 이들은 청년들이 사라진 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이들 세 친구 역시 담배 한갑을 공평하게 나누지 못해 뿔뿔이 흩어진다. 작가는 세 친구 사이에 존재했던 삼각형(연대감)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점점 멀어지면서 깨진다고 훌륭하게 묘사한다. 각자의 적나라한 내면과 폭력을 드러내 보인 이들의 우정 역시 물론 사라질 것이 빤하다. 세 친구의 여정을 따라가는 우리는 비루하고 코믹하고 역겨운 이들의 행동에 웃고 비난하면서 읽게 된다.
하지만 작품을 읽고 난 뒤에는 이들의 원초적인 분풀이와 폭력성에 대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동질감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물론 계급의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특히 술 취하면 표출되는 부끄러운 이면들이 등장인물들과 닮아 있어서일 것이다. 「여행」이 동물적인 인간 내면을 까발린다면 「설악 풍정」이나 「피서지에서 생긴 일」은 여행지에서 발생하는 온갖 코믹한 상황과 에피쏘드들을 동원해 남성의 성적 욕구와 환상을 희화시키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설악산 등반에서 만난 선녀로 비유되는 미모의 여성을 따라가는 ‘나’가 등장하는 「설악 풍정」이나, 고향 친구들이 역시 같은 고향 출신인 여자애들을 쫓아 계곡에 놀러가는 「피서지에서 생긴 일」은 변변치 못한 인간들의 분출구를 찾는 여정을 아주 코믹하고 비굴하게까지 그리고 있다.
이들 작품 역시 비루한 화자나 주인공들의 대척점에 고상하고 부유하고 좋은 대학과 직업을 가진 남성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배치는 화자들의 적나라한 욕구를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와 연결된다. 두 작품 모두에서 술에 취해 남자를 여자로 착각해서 벌어지는 소동은 독자로 하여금 그야말로 배꼽을 잡게 한다.
실컷 웃고 난 뒤에는 또한 작중인물들이 내보이는 과장된 성적 억눌림이나 환상이 우리 자신이 애써 감추려 한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성석제는 아주 유머 넘치는 상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양면성을 파헤치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중독의 끝에서 다다른 눈물중독 표제작 「지금 행복해」는 이 작품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그간 성석제 소설에 종종 등장한 중독자의 이미지는 이 소설에서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표출된다. 화자의 아버지는 온갖 ‘중독의 집합체’라 할 만큼 이력이 화려하다. 당구 노름 마약 술 등에 중독되어 가정을 방치하고 수감생활까지 한 뒤 아들에게 나타난 아버지는 무기력한 한량의 전형이다. 무기력한 동시에 아들에게 “이제 친구로 지내자”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독특한 아버지상이다.
아들 역시 아버지를 덤덤하게 친구처럼 대하고 대화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부모자식 관계는 소설에서 모녀지간을 통해서는 종종 그려졌지만 부자간에서 드러난 것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를 향한 자식의 적의가 없다는 것도 특이한 설정이다. 이들 사이에는 끈끈한 가족애도, 연대감도 아닌 단지 한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연민과 충고가 있을 뿐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별거하면서 열애중인 어머니의 이혼서류를 내밀고 도장을 찍으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아버지 또한 이에 순순히 응하는 ‘쿨’한 사이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 이혼서류를 갖다주고 어지간하면 도장을 찍으라고 말하는 아들이 인류역사에 몇명이나 될까. 나는 유별난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친구니까 친구로서 권유한 것이다. 엄마가 내게 시킨 건 절대 아니다. 엄마는 지금 이대로도 상관없다고 할 것이다. 엄마와 애인이 살고 있는 집에 아버지가 쳐들어가서 어떻게 할 것도 아니다.(67면) 여느 중독자와는 달리 아버지는 스스로가 알코올중독자 요양시설에 들어가기를 자청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존의 성석제 소설에 등장하는 중독자 이미지가 허무에 탐닉하는 미학적 요소가 있었다면 이 소설의 중독자 이미지는 삶을 긍정하면서 현실에 발붙이려는 노력이 눈물겹게 그려진다.
아버지는 모든 중독을 거쳐 ‘남을 돕는 데’ 중독되고 종내에는 ‘눈물중독자’로 변화된다.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 또는 중독된 삶의 아름다운 결말은 작가가 설정한 부자간의 독특한 관계 때문에 더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평론가 이경재 역시 「해설」에서 이 점에 주목한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나 『인간의 힘』에서는 적대의 환원 불가능한 특성 앞에서 변증법적 대립을 넘어서는 긍정적인 인간상을 감동적으로 형상화한 바 있다. 이들의 긍정은 황만근이 죽기 전날 민씨와 나누는 대화가 보여주듯이, 니체가 말한 ‘아니오’를 모르는 나귀의 긍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처한 시공은 어디까지나 전근대적이거나 허구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근대적 시공을 배경으로 할 때 이러한 중독은 긍정적인 성격을 잃고, 허무주의적 색채를 짙게 드러내곤 했다. 당대와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중독의 윤리학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 성석제 소설의 중요한 과제였다면, 이번 소설집은 그 과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남 도와주는 거에 중독되기’ ‘눈물에 중독되기’가 그 구체적인 모습이다. (…) 이때의 눈물이 타자의 삶과 인생에 대한 따듯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통렬한 자기반성, 옆에 있는 자의 숨소리에 귀기울이는 작은 실천을 통해서 이 사회를 촘촘하게 갈라놓고 있는 적대와 균열의 선들 사이에는 따뜻한 눈물이 흐르게 된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지켜본 것이 행복이었다면, 그 눈물이 흘러간 자리의 단단함을 지켜보는 일은 차라리 축복에 가까울 것이다. ― 해설 「‘정치적인 것’의 복원」 모자이크된 인간군상 이번 소설집에서 다른 작품들과 변별점에 위치한 작품이라면 「톡」을 꼽을 수 있다. 작중인물들이 이니셜로 등장해 서로 겹치거나 독립된 사건들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자동차보험 사기, 지하철 성추행, 트랜스젠더, 성생활 보조제, 농작물 서리, 날치기, 주부도박, 개똥녀 등등 다양한 사건들을 건조한 문체로 나열하는 이 작품은 기존의 성석제 소설에서 접하기 어렵던 문법과 재미를 선사한다. 이런 사건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도 계속된다는 설정은 현대사회의 비인간성과 도덕성 상실을 일상적으로, 아이러니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모자이크된 군상들은 한 시대를 엿보는 만화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경재의 표현을 빌리면 ‘작가의 치열한 자기모색’과 ‘이 사회의 적지 않은 변화’에서 영향받아 일구어낸 ‘건조한 산문성’으로 작품세계를 갱신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기적처럼」에서는 「지금 행복해」와는 또다른 가족관계를 보여준다. 비정상적인 가족의 관계와 구조 속에서 화자는 피폐해지는데, 작가는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가정에도 존재하는 다양하고 비루한 인간유형을 파헤치며 전시한다. 가학적인 어머니와 동생, 아들 사이에서 화자는 소외되고 폭력에 노출된다.
가족관계에서 이런 일상이 지속되면 인간은 “더부살이에, 삶 같지도 않은 삶에, 욕설에, 싸움에”(118면) 중독된다는 것을 작가는 정교하고 세밀하게 묘사해낸다. 이밖에도 「낚다 섞다 낚이다 엮이다」는 낚시터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에피쏘드에 농담과 과장을 섞어 재미를 선사한다. 예술적 재능이 부족한 아이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의 그림으로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은 이후 화가로 성장한다는 성장소설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과, 국숫집에서 한 노숙자가 무료로 식사를 대접받은 뒤 그가 사업가로 대성한다는 미담을 통해 사실과 소설의 경계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투영된 「깡통」 역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성석제의 이번 작품집은 그의 특유의 입담과 문체로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릴 만큼 재미있다, 우습다.
눈물나게 우습다가도 가슴 한켠이 불편하고 서늘해지고, 서늘해진 뒤에는 따스해지기도 한다. 중독된 인간 유형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소설들이지만 정작 중독되는 것은 독자들이다.
허구적이고 비현실적인 유머와 농담과 허풍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감을 가지고 내면을 파고드는 감동적인 웃음과 슬픔의 공존, 이것은 작가의 노력과 갱신의 결과물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웃어넘기지 못하고 내내 가슴에 남는 이야기들의 여운이야말로 다시 한번 성석제의 저력을 확인하게 할 것이다.
재미와 감동을 겸비한 성석제의 소설이 없었다면 우리의 빤한 일상은 얼마나 재미없고 밋밋할 것인가.
Changbi Publishers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중단편 소설집으로『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조동관 약전』『호랑이를 봤다』『홀림』『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참말로 좋은 날』『지금 행복해』 등과 짧은 소설을 모은 『재미나는 인생』『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펴냈다. 장편소설에는『왕을 찾아서』『아름다운 날들』『도망자 이치도』『인간의 힘』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Sung Sukje is an exceptionally gifted raconteur. Sung takes ordinary characters, especially those who populate the peripheries of the society¡-thugs, gangsters, villains, vagabonds, criminals. The familiarity we find in Sung’s characters, despite the fact that they seem exaggerated or even unlikely at times, lies in their embodiment of the comic and the absurd we recognize in ourselves and in others. Sung adroitly balances the tension between exaggeration and lies, pithy and prolix expressions, laughter and pathos to provide constant textual pleasure. Sung has not only garnered critical acclaim but also enjoyed immense popularity. He is the recipient of 1997 Hankook Ilbo Literature Prize and 2002 Dong-in Literature Pr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