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이야기

· 창비세계문학 Book 53 · 창비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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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보석이여!”

단편소설의 제왕 체호프의 대표 중단편선

문학적 원숙기를 여는 중편 「지루한 이야기」 국내 초역

 

20세기 현대문학의 초석을 세운 단편소설의 제왕이자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천재 극작가로 평가받는 러시아 대문호 안똔 체호프의 중단편선. 이 선집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중편 「지루한 이야기」(1889)와 함께, 기괴함과 사실주의가 결합되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작 「검은 옷의 수도사」(1894), 그리고 가장 완성도 높은 대표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등 3편의 작품이 묶여 있다. 국내 초역작인 「지루한 이야기」는 체호프의 저술 활동 10년을 결산하고 문학적 원숙기를 여는 이정표가 된 작품이며, 의사로서 그의 경력이 작가 체호프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새롭게 확증해준 작품이다. 어떤 문학사적 명명으로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체호프는 막심 고리끼, 캐서린 맨스필드, 존 치버 등 여러 현대소설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삶이 지닌 범속함과 모호함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려낸 독특한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번역자 석영중 교수는 상세한 작품해설로 각 수록작의 의의뿐 아니라 의사와 작가라는 두가지 상보적 정체성을 지녔던 인간 체호프와 그의 문학을 좀더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을 제공해준다.

 

 

삶의 모호함과 슬픔을 응시하는, 체호프 문학의 전환점

의사 체호프와 작가 체호프가 함께 쓴 「지루한 이야기」

 

“체호프는 글쓰기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글쓰기다. 그는 인상파 예술가들처럼 자기만의 특별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똘스또이

 

중편 「지루한 이야기」는 체호프가 생활비를 벌 목적으로 1880년부터 시작한 10년간의 저술 활동을 뒤로하고 작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들며 발표한 첫 작품이다. 농노의 손자이자 도산한 잡화상의 아들로서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던 체호프는 의과대학 재학 시절부터 졸업 후 의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잡지에 필명으로 짤막한 이야기들을 기고한 고료로 생계를 꾸려갔다. 러시아 문단의 원로 그리고로비치와 제정러시아의 인기 일간지 편집장 알렉세이 쑤보린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1886년 이후에야 체호프는 더 적은 수의, 더 뛰어난 작품을 본명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9년작 「지루한 이야기」를 기점으로 체호프는 작가적 입지를 더욱 굳혀갔다.

‘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은 「지루한 이야기」는 한 명망 높은 병리학자의 말년을 통해 평생의 신념과 통합적 감수성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그동안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체호프의 중단편 중 단연코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체호프가 처음으로 폐결핵 징후를 보인 해에, 형 니꼴라이의 사망 직후 쓰인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두고 병증을 자각하는 노교수의 시각으로 죽음이란, 또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노교수는 “재능 있는 손끝에서 창조된 아름다운 예술품”과 같았던 지난 삶과 어울리는 ‘인간다운 죽음’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만일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닥쳐온 위험이라면 나는 그것을 교사이자 학자이자 그리스도교 국가의 시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맞이해야 하겠지. 즉 용감하고 평화로운 영혼으로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지금 피날레를 망치고 있어.”(63면) 삶의 끝자락에 선 노인은 온몸으로 허무감을 느끼지만, 실패였다고 규정하기에 그의 삶 곳곳에 밴 행복의 단서들은 너무나 아름답다.

똘스또이의 평가처럼 체호프의 단편소설이 새로운 종류의 글쓰기로서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데에는 그의 의사로서의 경력이 크게 작용했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후에도 체호프는 공공의료 사업에 헌신하는 ‘젬스뜨보(Земство) 의사’로서 직업적 소명을 다했다. 「지루한 이야기」에서 체호프는 형이상학적 관념 대신 고통에 관한 물리적인 개념과 어휘로 나이듦을 성찰하고 생의 굴곡을 응시한다. 이 소설이 노화의 증상들을 관찰하고 거기서부터 실존적 사색을 이끌어낸 것은 체호프가 가진 의사의 눈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의사로서의 체호프는 그의 문학에 객관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작품에 박애주의의 자리를 마련했고, 현실로 구체화되지 않는 사상은 무의미함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신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관한 작가적 성찰을 이끌어냈다. 체호프가 다른 선배 대문호들과 달리, ‘도덕’이나 ‘구원’ 같은 특정 주제나 사상을 자신의 문학의 핵심으로 내세우지 않은 이유는 책상물림 대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의미와 무의미 사이 인간 실존을 탐사하는 소설들

문제작 「검은 옷의 수도사」와 대표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범속하고 천박하고 시시한 삶을 윤색 없이, 마치 관찰자처럼 그렸던 체호프는 일각에서 ‘절망의 작가’로 불리기도 했으나, 절망은 결코 그의 결론이 아니었다. 그는 답을 열어둔 채, 철저하고 냉정한 관찰을 통해 인간적인 것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체호프의 문학이 범속성을 주로 다룬다 함은 그가 계급이나 지위를 불문하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핵심에 관심을 두었다는 뜻이다.

「검은 옷의 수도사」는 사실주의와 신비주의가 기이하게 결합해 있어 체호프의 단편소설 중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1890년 악명 높은 유배지 싸할린 섬을 탐사한 이후 체호프가 인간에 대한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쓴 작품 중 하나로, 작가 자신은 이를 과대망상을 주제로 한 의학소설이라 명명했다. 한 촉망받는 젊은 인문학자가 환각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를 만나며 정신적, 신체적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다. 발표 당시부터 ‘검은 옷의 수도사는 영감을 주는 정령인가, 파멸시키는 악마인가’ ‘청년은 비극적 천재인가, 추악한 이기주의자인가’ 등 저자의 의도와 내용의 의미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체호프에게 현상 자체는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체호프 특유의 모호함과 기괴함을 통해 소설은 환대가 일순간 뒤틀린 열정이 되고, 사랑이 어느 틈에 몰이해가 되고, 자유로운 정신 활동이 어느새 병증이 되는 인간의 조건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체호프가 건강 악화로 요양차 이주한 얄따에서 현지를 배경으로 집필한 작품으로, 체호프 단편소설 중 손꼽히는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이기적인 중년 남성과 특별한 매력 없는 젊은 여성 간의 불륜은 체호프의 손에서 사랑의 질료인 시간과 연민에 대한 성찰로 변화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남녀의 불륜이라는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도덕주의를 따르지 않는 이 소설은 이전의 체호프 소설에는 낯설었던 ‘사랑’이라는 주제를 문학적으로 완성시킨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옮긴이의 말처럼 “범속한 불륜이 닥터 체호프의 시각에 포착된 삶의 일면이라면, 그 범속한 일상 속에서 작은 의미의 불씨를 찾아낸 것은 작가 체호프의 눈이리라”(244면).

『지루한 이야기』에 실린 3편의 중단편은 44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체호프가 불과 29세에서 39세 사이에 발표한 소설들임에도 각각의 방식으로 원숙함의 경지를 보여주며, 누추한 일상과 그 안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들을 확인하게 해준다.

 

 

‖ 차례

 

지루한 이야기

―어느 노인의 수기

 

검은 옷의 수도사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작품해설/모호하고 슬픈, 그래서 매혹적인

작가연보

발간사

 

 

 

‖ 책 속에서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척도였다. 나를 칭찬하고 싶으면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바닐라 맛이야.’ 그녀의 손가락에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하나는 피스타치오, 다른 하나는 바닐라, 세번째는 산딸기,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 인사를 하러 들어오면 나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말하곤 했다. ‘바닐라…… 피스타치오…… 레몬……’” (「지루한 이야기」, 17면)

 

“이 시간이면 누군가 방에 들어올까봐 두렵고 갑자기 죽을까봐 두렵고 내 눈물이 부끄럽다. 전반적으로 내 영혼 속에 무언가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이상 램프도 책들도 마룻바닥 위의 그림자도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참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거칠게 아파트에서 끌어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서둘러 옷을 입고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살금살금 거리로 나간다. 어디로 가느냐고?

여기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다. 까쨔한테로.” (「지루한 이야기」, 57면)

 

“내가 아무리 많이 생각해도, 그리고 내 생각의 범위가 아무리 넓어도, 내 소망은 무언가 아주 중심적인 어떤 것, 대단히 중요한 어떤 것을 결여한다. 그걸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과학에 대한 나의 애착, 더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 낯선 침대에 앉아 스스로를 알려고 하는 시도, 이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내가 삼라만상과 관련하여 정립하는 개념들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엮어주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내 안에서는 감정과 생각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아무리 능숙한 분석가라 할지라도 과학과 연극과 문학과 학생들에 관한 내 의견, 그리고 내 상상력이 그리는 온갖 그림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신이라 알려진, 혹은 공통이념이라 알려진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지루한 이야기」, 102~03면)

 

“어째서, 어째서 당신들은 나를 치료한다고 했지? 브롬화칼륨, 휴식, 뜨거운 목욕, 감시 감독, 내가 한모금 넘길 때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안달복달하기, 이 모든 것이 결국 나를 멍청이로 만들 거라고. 그래, 나 미쳤었어. 과대망상증이 있었어. 하지만 그때는 즐거웠고 건강했고 행복했어. 나는 재미있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지. 지금 나는 좀더 합리적이고 좀더 튼튼하게 되었어. 하지만 그 대신 그냥 보통 사람이 되었어. 평범한 놈이 되었어. 사는 게 지겨워…… 아, 당신들 나한테 정말로 잔인했어!” (「검은 옷의 수도사」, 154면)

 

“너무나도 평범한 이 말이 어쩐 일인지 구로프를 갑자기 당혹스럽게 했다. 그의 말은 모욕적이고 불결하게 들렸다. 이 무슨 몰상식한 인간들인가! 이 무의미한 밤들, 이 재미없고 따분한 날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광란의 카드 게임, 폭식, 만취, 늘 똑같은 수다. 불필요한 행동과 판에 박힌 듯한 이야기들이 세월의 가장 좋은 부분과 활력을 가로채가고 결국 남는 것은 꼬리도 잘리고 날개도 잘린 삶인데, 우리는 마치 정신병동이나 수인부대에 감금이라도 된 듯 거기서 도망칠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다니!”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186면)

 

“어쩌면 이 변함없음,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벽한 무관심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지상의 삶과 중단 없는 완성을 약속해주는지도 모른다. 새벽의 여명 속에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이는 젊은 여성과 나란히 앉아 있노라니 구로프는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바다와 산과 구름과 드넓은 창공이 그리는 동화처럼 아름다운 광경에 매혹되었다. 우리 스스로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에 관해 잊은 채 생각하고 저지르는 일들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186면)

 

 

‖ 옮긴이의 말

 

체호프는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위대함을 추구했던 작가다. 그는 낙관과 염세 사이, 웃음과 눈물 사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 진지함과 시시한 것 사이의 경계선에 놓인 우리 대부분의 삶을 객관적이고 냉정한 의사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강인한 의지와 열정으로 삶을 살았으며 작가의 언어로 그것을 풀어놓았다. 단순한 문체로 쓰인 이야기들은 때로 망치로 돌변해 독자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그의 작품 중 난해하고 복잡한 소설은 한편도 없지만 쉽게 읽히거나 이해되는 소설 또한 단 한편도 없다.

―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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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 지은이 안똔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겸 의사. 20세기 현대문학의 초석을 세운 단편소설의 제왕이자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천재 극작가로 평가받는다. 1860년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따간로그에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끄바 대학 의학부 재학 시절 ‘안또샤 체혼떼’라는 필명으로 잡지에 유머러스한 짧은 이야기들을 기고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러시아 문단의 원로 그리고로비치와 『신시대』의 편집장 쑤보린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정신적, 경제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1886년 『신시대』지에 본명으로 단편소설 「추모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888년에 단편소설집 『황혼』으로 뿌시낀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북방통보』지에 「지루한 이야기」를 발표하며 저술 활동 10년을 결산하고 원숙기를 열었다. 1890년 싸할린 여행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가 더욱 깊어져 「6호 병동」 「검은 옷의 수도사」 등 정신질환을 소재로 하는 일련의 작품을 내놓았다. 600여편의 단편소설 외에도 13편의 희곡을 썼고, 그중 4대 장막극으로 불리는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은 모더니즘 연극을 탄생시킨 주요 극작가로서의 명성도 가져다주었다. 특히 1898년 모스끄바 예술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둔 「갈매기」의 두번째 상연은 현대연극사에 한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된다. 1860년대부터 공공의료 사업에 앞장섰던 ‘젬스뜨보 의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했지만, 지병이었던 폐결핵은 치료하기를 거부했다. 1904년 7월 2일 44세의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사망했고, 유해는 모스끄바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 옮긴이 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러시아문학회장, 한국슬라브학회장을 역임했다. 고려대에서 노어노문학 학사학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뿌시낀 메달을 받았으며, 제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뇌를 훔친 소설가』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어떻게 살 것인가』(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가난한 사람들』 『분신』 『우리들』 『대위의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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