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들여다본다

· 창비시선 Book 325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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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온몸으로 쓴 진실한 시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권지숙 시집 『오래 들여다본다』에는 문인으로서의 그 어떤 주목과 명예와도 거리를 둔 채 그저 홀로 ‘시’에 대한 열정만으로 삶을 견뎌온 ‘시인’이라는 존재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권지숙 시인은 1975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젊음의 격정과 좌절에 바치는 한 시대의 헌사’(염무웅「해설」)라는 평을 받은 「아우를 위하여」(발표 당시 「내 불행한 아우를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런데 정호승, 김명인, 김창완 시인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활동을 하던 시인은 1980년대 이후 돌연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창작과비평 창간 30주년인 1996년을 비롯, 90년대와 2천년대를 거치며 간혹 지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여전히 은둔과도 같은 생활을 지속했기에 이번 시집은 등단 35년 만의 첫시집이라는 문단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사실과 함께 문단에서 멀어졌지만 오롯이 시인으로 살아낸 그의 삶 자체라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70년대에 시단에 나온만큼 그의 시에는 그 시대의 암울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폭력과 억압이 만연하고 투쟁과 죽음이 일상화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시인은 늘 밤길을 걷는 듯한 막막함을 느낀다. ‘야행기(夜行記)’ 연작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밤’의 정서는 시인의 시가 태동한 근원적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모든 병든 자들의 노래는 시작된다 // 모호한 몸짓으로 모두들 헤어져버린 거리에서 / 푸른 밤은 열리고 / 석고처럼 굳은 얼굴들 /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 미라가 된 도시 / 능히 재로써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 소란스런 이 시간 어리석은 짐승들 울부짖는다 / 저 어두운 묘혈 속에 숨어 있던 자들 / 서서히 모반의 층계를 오른다(「야행기 5」 부분)

화자를 옥죄는 어둡고 막막한 공기를 표상하는 공간은 도시이다.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 속에서 양적으로 크게 팽창한 도시야말로 한국사회의 수많은 모순들이 집약된 곳인 동시에 그렇기에 어둡고 암울한 현재적 시간 안에 웅크린 채 여명을 기다리게 되는 생의 거점인 것이다.


공복의 텅 빈 길 위에도 / 사막 같은 아침이 오기는 오겠죠 / 푸른 달빛이 찬 길바닥에 얼룩처럼 스며들 때 / 살찐 남자 하나 계단에 드러누워 / 상형문자로 불안한 잠꼬대를 하고 / 마침내 도시의 아침은 모퉁이에 숨어 기다려요 / 밤은 찾는 자의 것 / 당신은 모르죠?(「밤의 편의점」 부분)

뜨겁고 패기 어린 시로 70년대를 넘어온 시인이지만 그 역시 하루하루의 삶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의 남루함이 자신의 일상을 지배하는 속에서, 더욱이나 시인의 이름에서 스스로 멀어져간 상황에서 그는 길고 긴 삶의 무게로 침윤해간다.


우는 아이를 업고 / 낯선 길을 한없이 헤매었다 // 길 위에 던져진 무수한 신발들 중에 / 내 신발 찾다 찾다 잠이 들었다 // 붉은 황톳물 넘치는 강을 내려다보며 / 해가 지도록 울었다 // 그렇게, 한 해가 갔다(「길 위에서」 전문)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생의 아픔에 마냥 짓눌려 있지만은 않는다. 스산한 고독 속에서도 그는 삶의 한순간들을 시로 승화하기 위해 감각을 가다듬는다. 이러한 노력은 조용한 방 안에서 액자 속의 게가 “다그락다그락 기어나”오는 절묘한 상상력(「게를 잡다」)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시인은 작위적인 생산을 거부하고 그저 자신을 닦으면서 시가 자연스레 다가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릴 따름이다.


너를 기다리는 이 시간 / 한 아이가 태어나고 한 남자가 임종을 맞고 / 한 여자가 결혼식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 너는 오지 않고 / 꽃은 피지 않고 / (…) /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 생애가 저무는 더딘 오후에 / 탁자 위 소국 한 송이 / 혼자서 핀다(「오후에 피다」 부분)

시인의 시를 말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키워드는 ‘길’이다. 30년이 넘게 아무도 동행하지 않는 외로운 길을 오롯이 걸어왔기 때문일까. 시인은 여러 시에서 ‘길’에 대해 직접적으로 노래한다. 이 길들은 많은 경우 시인의 어린시절의 기억 속에서 펼쳐진다. 자못 낭만적으로까지 제시되는 옛스러운 장면들은 어느새 기억 속 부모의 나이가 되어버린 시인의 스산한 삶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자 폭발적인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잊힌 오래전의 추억을 되새기게 되는 아련한 한편의 이야기로 기능한다.


엄마가 찾아간 곳은 장터 끝 작은 집 엄마는 / 망설임 없이 찔레덩굴 우거진 뒤꼍을 돌아 작은 봉창 틈을 / 오래 들여다본다 나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서 동동거리다가 / 뒤꼍 모서리에 앉아 오줌을 눈다 대여섯살 적의 일이다 // 돌아가는 길은 달이 구름 속에 숨어 온통 깜깜했고 엄마는 / 몇번이고 발을 헛디뎠다 / 그날 밤에도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밤길」 부분)

힘겹고 외로운 삶 속에서, 끝없이 잉태되는 사회의 여러 모순을 바라보며 시인은 깊은 외로움과 절망을 느낀다. 시집 전반에 걸쳐 이러한 정서를 엿볼 수 있는바, 그럼에도 그는 이 고독과 비애 속에서 때로 어렵게 아름다움을 길어올린다.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이같은 아름다움은 현란한 수사나 의도적인 주제와는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오래 들여다본다’라는 표제는 그런 의미에서 시와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참다운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담박한 노래가 더욱 진정성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시인의 일생을 통해 빚어진 때문일 것이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결코 간단치 않을 이 오랜 길을 통해 오늘 우리는 새삼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얻게 되었다.


신생의 이 황홀한 회오리 / 온 산이 잠시 날카로운 빛 속에 쓰러진다 / 이내 허리 곧추세우고 날개를 말리는 나비 / 최대한 가벼워지기 위해 / -어머니는 수숫대마냥 야위어가고 / 홑눈으로 보는 연둣빛 하늘 / 잠시 머뭇거리는 어지러운 생 // 나비 한 마리 기어이 / 온 우주를 난다(「나비, 날아가고」 부분)

Changbi Publishers

About the author

194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75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내 불행한 아우를 위하여」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반시(反詩)’ 동인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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