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해서 말하는 단 한 편의 시가 있다!
독창적인 상상적 언술의 최극단으로 한국 현대시의 미학을 끊임없이 갱신해온 시인 김혜순이 열한번째 시집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 시인선 480, 문학과지성사, 2016)를 출간했다. 미당문학상(제6회, 2008)과 대산문학상(제16회, 2008)을 수상한 『당신의 첫』(2008)에서 강렬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한데 추동하는 장시 「맨홀 인류」를 수록한 『슬픔치약 거울크림』(2011)에 이르기까지, 김혜순의 시 세계는 시적 화자 스스로 몸이 부서지고 변화하며 격렬한 이미지의 연쇄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몸서리치는 파동으로서의 몸-리듬 혹은 몸-소리라는 새로운 시-언어를 발견/발명하는 데 전력을 다해왔다.
김혜순의 시를 통해 우리는 산/죽은 채로 남성 중심의 지배적 상징질서의 역사가 휘둘러온 폭력에 맞서는 ‘모래 여자’의 몸-비명을 들었고, 악취로 진동하는 ‘전 세계의 쓰레기와 쥐들’이 투척된 구멍 속에서 분출하는 ‘맨홀 인류’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관습적으로 해석돼온 한국 여성시의 풍경과 문법을 비틀고 타파한 이가 김혜순이며, 그리하여 김혜순의 시는 1980년대 이후 한국 시에서 강력한 미학적 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김혜순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시학이며, 김혜순 시학은 하나의 공화국”으로서, “동시대의 여성 시인들이 김혜순 공화국의 시민이었으며, 특히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언술 방식과 김혜순 시학의 상관성은 더욱 긴밀”(이광호, 문학평론가)하다고 말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멈추지 않는 상상적 에너지로 좀처럼 자기 반복이라곤 허용하지 않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매번 다른 목소리를 내온 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세상의 모든 약한 존재자들을, 죽음과 부활을, 사랑과 욕망을, 성과 식(食)을 제 몸에 구현한 ‘다면체-돼지”(권혁웅, 문학평론가)의 몸과 입을 빌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 이 세계의 부패와 폭력, 비참과 오욕의 현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붉은 물감처럼, 세계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돼지들의, 돼지들을 위한, 돼지들에 의한 장엄한 비창”(조재룡, 문학평론가)으로서, 시집 『피어라 돼지』는 허섭스레기처럼 너덜너덜해진 우리 삶과 사회를 때로는 조롱과 유머로, 때로는 격렬한 아픔으로 통과하며 “시를 가동”한다.
대상을 주관적으로 비틀어 만든 기괴한 이미지들과 속도감 있는 언어 감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김혜순이 시를 통해 끈질기게 말하는 것은 죽음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뜻없음, 지옥에 갇힌 느낌이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 개체의 종말로서의 현상적,실재적 죽음이 아니라, 삶의 내면에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앉은 관념적,선험적 죽음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 『어느 별의 지옥』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어느 별의 죽음』은 세계의 무목적성에 대한 오랜 응시로 삶에 예정되어 있는 불행을 눈치채버린 이의, 삶의 텅 빔과 헛됨, 견딜 수 없는 지옥의 느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관주의적 상상력이 빚어낸 시집이다. 그의 시 세계는 일상적이고 자명한 것의 평화와 질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난폭하게 찌르고 괴롭힌다.
김혜순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초등 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원도 원주에 이사해 거기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원주여고를 거쳐 1973년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7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처음 써 본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선하고, 이어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솔가」등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대학 졸업 뒤 「평민사」와 「문장」의 편집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3년 「김수영 시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1998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낯설고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던 그의 시세계는 비로소 문단의 공인을 받는다. 2019년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를 수상했다.
김혜순 시의 착지점은 '몸', 그것도 해탈이 불가능한 '여성의 몸'이다. 해탈이 불가능한 몸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상상력은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식육적 상상력으로까지 뻗친다. 이런 점에서 김혜순의 시를 "블랙유머에 바탕을 둔 경쾌한 악마주의"의 시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는 자기 시의 발생론적 근거를 '여성'과 '여성의 몸'에서 찾는다. 이에 대해 그는 "식민지에 사는 사람은 절대 해탈이 불가능하다. 여성은 식민지 상황에서 살고 있다. 사회학적 요인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식민지성이 있다. 이때의 여성은 인식론적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여성이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