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는 일제 식민지 하이던 1921년과 1923년 여름, 두 차례에 걸쳐 금강산을 유람한다. 한반도 최고의 경승(景勝)을 돌아본 천재 작가는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 잡지 <신생활>에 첫 번째 금강산 기행문을 연재했다. 그리고 두 번째 금강산 유람에 대하여 쓴 글을 합쳐 1924년 출판사 시문사에서 이 책『금강산 유기(遊記)』를 출간했다.
그로부터 근 90년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기행문의 백미로 삼을 만큼 보기 드문 명문’을 다시 한 번 감상하기로 했다. 다만 한문과 한자식 어투가 많아 가능하면 당시의 표현과 문법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오늘의 어법에 맞도록 쉽게 고쳤다. 해제를 맡은 작가 문형렬은 “문장이 유려하면서도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 금강의 아름다움을 그린 그의 글을 따라 읽으면 함께 금강산 구경을 다니는 느낌이 들 만큼 절승(絶勝)을 묘사한 솜씨가 뛰어나면서도 구체적이라 가슴을 울렁울렁하게까지 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철마다 다른 흥취, 이름마저 다양한 금강산
잘 알다시피 금강산은 철마다 이름이 다르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불리는 것이다. 하필 두 번 다 여름철에 구경 간 춘원은 이렇게 썼다.
“단풍철에 석양이 천봉만만(千峯萬巒=천개의 봉우리와 만개의 산, 무수한 산과 봉우리)을 비추는 경치는 참 아름답다 합니다. 그래서 금강의 진면목은 단풍철에 있고 단풍철의 진면목은 석양에 있다 합니다. 나는 불행히 여름철에 왔기 때문에 이 단풍과 석양의 금강을 보지 못함이 한이거니와, 그렇다고 금강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단풍철에만 한할 것은 아니외다. 겨울철에 허옇게 흰 눈이 내린 금강과 봄날 차가운 노을이 가득한 금강도 좋은 것이요, 지금 내가 목전에 대하고 있는 여름철 안개의 금강, 구름의 금강, 비오는 금강, 넘치는 햇빛 속의 금강, 물소리의 금강도 아름다움을 버릴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변화의 다양함은 여름철이 제일일 것입니다.”
그야 어쨌든 금강산 길이 막혀 있는 지금, 우리는 이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행을 기약하며 춘원을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펴기로 한다.
“안개가 봉우리의 허리를 두르니 봉은 창천에 달린 듯하고, 봉의 머리를 싸니 봉은 머리 없는 봉이 됩니다. 다시 그 안개가 봉을 머리에서 배까지 가르니 문득 하나의 봉우리가 쌍봉이 되고, 그 안개가 소나무와 잣나무 속에 스러지니 쌍봉이 일봉이 됩니다. 다시 안개가 송백 속에서 나와 엉키니 문득 흰 바위가 되고, 엉키었다 새로 흐르니 문득 폭포가 되고, 폭포가 되었다가 마침내 흩어지니 한 무리 면양(綿羊)이 되고, 스러져 하늘로 오르니 신선이 차를 달이는 연기가 됩니다.”
슬행, 수행, 지행, 복행?
난코스로 알려진 수미암 가는 길의 어려움을 표현한 글을 읽노라면 왠지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둔행칠리(臀行七里), 내려오려면 엉덩이를 대고 걷는 데가 7리나 된다는 뜻이외다. 과연 암자에서 몇 십 걸음을 못 가서부터 풀뿌리를 더위잡으며 바위 뿌다귀에 손가락을 걸고 매어달릴 데가 옵니다. 무릎을 발삼아 쓰니 슬행(膝行)이요, 손을 앞발 삼아 쓰니 수행(手行)이외다. 게다가 일전에 비가 와서 미끄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약한 풀뿌리를 더위잡아 가며 몸의 탄력을 이용하여 뛰어오르니, 우뚝 서기만 하면 미끄러질 데가 있습니다. 손가락을 바위 조금 턱진 데다가 걸고 한 손가락씩 발발 떨며 옮겨 놓아, 그 힘에 몸이 한 치씩 두 치씩 배밀이를 하여 올라가는 데가 있으니 이는 복행(服行)이요, 지행(指行)이외다.”
아쉬움 한 보따리, 안타까움 한 보따리
기행을 마치며 춘원은 “백탑동 구경으로 다시 금강에 든 목적도 다 달하였습니다. 아직도 남은 것이 비로봉의 일출과 월출을 보는 것과, 발연의 달님 목욕을 하는 것과, 성문동에 들어가는 것이거니와, 이보다도 금강의 봄 풍경과 가을철 단풍과 겨울철 구름 풍경을 봄이니…”라며 잔뜩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군데군데 낙서로 더럽혀진 광경을 목도하고는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
“참말 금강산 바윗돌은 행복이외다. 석수(石手)가 들어와 때려낼 근심도 없고, 천공(天公)이 만들어놓은 그대로 오직 맑은 물과 맑은 바람에 천공의 자애로운 조탁(彫琢)을 받아 날로날로 모양을 변하며, 날로날로 아름다워지면서 천국에 임하기를 기다릴 뿐이외다. 오직 사람의 발이 갈 수 있는 바위가 수없는 추한 자들 이름자에 더럽혀진 것이 한이외다.”
그가 만약 북한의 온갖 구호로 범벅이 된 오늘의 금강산을 보면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뿌릴 것만 같다.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소설가로 각광을 받았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유학, 철학을 전공했다. 1919년 도쿄 유학생에 의한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21년 귀국하여 1923년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으며, <조선일보> 부사장(1933년)을 지내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납북된 얼마 뒤 타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흙』『마의태자』 『단종애사』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영남대 사회학과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장편소설 『바다로 가는 자전거』 『눈먼 사랑』 『아득한 사랑』, 소설집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슬픔의 마술사』 등이 있으며, 시집 『꿈에 보는 폭설』을 발표했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을 해제하여 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