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 창비시선 Book 426 · 창비 Changbi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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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서정시마저 금지되었던 시간을 지나

오늘 우리가 새롭게 만나는 나희덕의 시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30년간 투명한 서정과 깊은 삶의 언어로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나희덕 시인의 신작 『파일명 서정시』가 출간되었다. 2014년 임화문학예술상 수상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여덟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과 생명력으로 가득한 낯익은 세계에서 벗어나, 블랙리스트나 세월호사건과 같이 ‘지금-여기’에서 발생하는 비극과 재난의 구체적 면면을 시 속으로 가져온다. 표제작 「파일명 서정시」에서는 냉전기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감시하며 작성한 자료집(‘Deckname Lyrik’, 파일명 서정시)을 소재로 차용하여,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민간인 사찰이 자행된 우리의 현실을 짚었다. 시인은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미처 하지 못했던 말, 그러나 해야 하는 말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이없는 죽음들부터 자본주의의 균일적 사고와 착취까지 절망과 파국의 현장을 낱낱이 들추는 폐허의 시편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나는 나희덕의 시, 처음 만나는 그의 ‘서정시'가 될 것이다.

 

차마 사람으로 건널 수 없는 사람의 일들을 건너는

힘이라 할 것도 없는 힘으로 다시 쓰는

 

나희덕의 시세계는 최근작들을 통해 변모와 전환을 이루어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죽음과 부재와 결핍이라는 서늘한 세계에 발을 딛고 선 이곳에서 시인은 “이것이 인간인가”(「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되물으며 “종이에서 시가 싹트리라 기다리지 마라”(「종이감옥」)고 선언한다. 어쩌면 시인이 처음 내뱉는 거칠고 직설적인 어법은 존재의 아픔과 곳곳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낱낱이 헤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이자, 이 자체로 새로운 미학을 향한 내면의 고투다.

삶의 숱한 참혹과 어이없는 죽음들 앞에서 시인은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무엇도 말할 수 없다는 절망감 사이에서 어떤 말도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러나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과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시인은 “간신히 벌린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말들”과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말들”(「문턱 저편의 말」)을 뱉는다. 이 비명 같은 말들은 서로 이어져 말다운 말이 되고, 다시 다른 말을 불러내 끝내 노래가 된다.

『파일명 서정시』의 노래는 슬픔의 힘으로 죽은 자를 불러내고, 비극을 움켜쥐고, 폭력을 직시하는 노래다. 진혼의 노래이자 저항의 노래다. 하나의 노래가 끝나고 다시 새 노래가 시작되기 전 흐르는 침묵, 이 찰나의 침묵에서 시인과 우리는 “죽어가는 존재들도/여기서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여기서는 잠시」)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시인은 고대 인도의 탄센 설화,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사찰한 기록,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쁘리모 레비의 증언,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 끌라우디아 요사 감독의 영화, 공동체주의자 찰스 테일러 등 다른 장르의 텍스트를 재구성해낸다. 세계의 참혹을 응시하는 다른 눈들과 눈을 마주치며,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부르는 자신의 노래가 여전히 아름다운 화음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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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 중에서

 

다만 비스듬히, 비스듬히, 말하는 법을 배울 거야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과

길게 성호를 긋고 사라지는 별똥별에 대해

수많은 대각선의 날들, 날개들, 그림자들, 핏자국들에 대해

대각선의 종족이 남긴 유언들에 대해

「대각선의 종족」 중에서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발들은, 얼굴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서

 

절망은 길가의 돌보다 사소해졌다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나날들」 중에서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흘러내리는 말. 모래 한줌의 말. 혀끝에서 맴돌다 삼켜지는 말. 귓속에서 웅웅거리다 사라지는 말. 먹먹한 물속의 말. 해초와 물고기들의 말. 앞이 보이지 않는 말. 암초에 부딪치는 순간 산산조각 난 말. 깨진 유리창의 말. 찢긴 커튼의 말. 모음과 자음이 뒤엉켜버린 말. 발음하는 데 아주 오래 걸리는 말. 더듬거리는 혀의 말. 기억을 품은 채 물의 창고에서 썩어가는 말. 고름이 흘러내리는 말. 헬리콥터 소리 같은 말. 켜켜이 잘려나가는 말. 잘린 손과 발이 내지르는 말. 핏기가 가시지 않은 말. 시퍼렇게 멍든 말. 눌린 가슴 위로 내리치는 말. 땅. 땅. 땅. 땅. 망치의 말. 뼛속 깊이 얼음이 박힌 말.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말. 감전된 말. 화상 입은 말. 타다 남은 말. 재의 말.

「문턱 저편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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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뱉지도 못하고 토해낸, 남루와 비루, 청음과 득음, 허기 같은 살기(殺氣), 죽음 그리고 죽음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쓰게 하는, 서른해 시의 시간들로부터 스스로 멀어져서, 돌아보지 않고 온몸으로 돌아서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음으로 허허로운, 가파른, 너른, 기록함으로 지우는, 지움으로 흔적을 남기는, 그 흔적에도 마음이 자주 걸려 넘어지는, 넘어진 자리에서 스러지는, 저주하지 않고 저주받는, 절망이라 하지 않고 절망하는, 기약 없이 보듬는, 이는 것들과 함께 일어, 차마 사람으로 건널 수 없는 사람의 일들을 건너는, 힘이라 할 것도 없는 힘으로 다시 쓰는,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나는 나희덕의 시, 우리가 처음 만나는 서정시.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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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이빨과 발톱이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내 안에서도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말들이 돋아났다.

 

이 피 흘리는 말들을 어찌할 것인가.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

시인이 된 지 삼십년 만에야 이 고백을 하게 된다.

 

2018년 가을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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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1부 • 종이감옥

눈과 얼음

심장을 켜는 사람

탄센의 노래

파일명 서정시

새로운 배후

늑대들

하이에나들

라듐처럼

종이감옥

나날들

정직한 사람

붉은 텐트

Rhythm 0

 

제2부 •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괴테의 떡갈나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들린 발꿈치로

난파된 교실

문턱 저편의 말

이 도시의 트럭들

혈거인간

우리는 흙 묻은 밥을 먹었다

미래의 구름

새를 심다

아누가 하늘을 만든 후

다리를 건너는 다리들

어떤 분류법

마크 로스코

 

제3부 • 주름들

나평강 약전(略傳)

숨은 숨

단식광대에게

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

어떤 피에타

슬픈 모유

주름들

천공(穿孔)

금환일식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여기서는 잠시

마지막 산책

질량 보존의 법칙

 

제4부 •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산책은 길어지고

저녁의 문답

남겨진 것들

향인(香印)

앵무조개

나이-톰보-톰보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대각선의 종족

대각선의 길이

108그램

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

 

해설|조재룡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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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

나희덕 羅喜德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등이 있다.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임화예술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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